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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달글 Dec 31. 2020

[곡식]먼플리 12월

심야 라디오

지난달 글에서 문곰님의 추천 음악은 누자베스였다. 누자베스의 곡은 많이 들어보지는 않았지만 요절한 천재 뮤지션, 재즈힙합의 아버지 이런 수식어로 기억하고 있다. 요절했기에 발매 곡도 많지 않고, 그렇기에 틀어놓으면 "음, 이곡" 할 수도 있겠으나 그중에서 내가 생생하게 기억하는 곡은 aurorian dance이다. 성급한 일반화겠지만 싸이월드 시절 음악이라면서 추천해주셨으니 아마 문곰님도 이 곡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나에게는 그 싸이월드 시절, 혹은 그보다 좀 뒤의 페이스북 시절에 듣던 심야 라디오를 떠올리게 하는 곡이기 때문에 이번 플레이리스트의 주제는 심야 라디오로 정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특히 관련된 기억들을 풀어놓는 글이 될 것이기에 이전처럼 번호를 붙이고 노래를 소개하기보다는 이야기 사이사이에 떠오르는 곡을 끼워 넣으려고 한다. 개인적인 추억을 늘어놓는 것이니 그리 재미있지 않을 수도 있고, 기억의 왜곡이 많겠지만 할아버지 옛날이야기 듣는 기분으로 들어주었으면 좋겠다.

https://www.youtube.com/watch?v=g9hwjQBQFIo&list=PL3PLdQhvAo-kPx8nOlFb7pl6VGC92DJim&ab_channel=NelsonObandoPatr%C3%B3n


라디오에 대한 추억이라고 하면 대부분은 고등학교 야자시간에 듣던 8~10시 라디오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그 시절에는 일절 듣지 않고 대학에 들어와서야 듣게 되었는데, 처음 접하게 된 사연은 기억이 안 난다. 다만 나는 신입생 때부터 거의 이틀에 한 번씩은 과제를 한답시고 친구 집에 갔다가 저녁 먹고 놀기만 하다가 막차를 타고 들어오곤 했는데, 스마트폰도 보급되기 전이라 밤 12시쯤 전철 안에서 mp3를 만지작거리다 우연히 듣게 되었으리라 짐작한다. 그렇게 처음으로 접했던 심야 라디오는 유희열의 라디오천국이었다.

라디오천국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좀 더 수위가 높은 유희열의 스케치북이었다.

(하기 부록. 아래와 같은 느낌이라고 보면 되겠다. 부록에 전설의 시청자 전화연결 편도 추가해놓았으니 궁금하신 분들은 링크로 타고 들어가 부록을 참고하시면 되겠다.)

https://www.youtube.com/watch?v=xt9OgkK0fAk&list=PL3PLdQhvAo-kewcsWLfaupBs7bphb2gM4&index=1&t=1s&ab_channel=hisangchu

https://www.youtube.com/watch?v=6fMps-PWB8Y&list=PL3PLdQhvAo-kPx8nOlFb7pl6VGC92DJim&index=2&ab_channel=funnynest

그중에서 기억에 남는 코너로는 월요일마다 라비앙 로즈라고 정재형이 나오는 정체모를 코너가 있었는데  어느새 만담 코너가 되어 뾰로롱 이라면서 요술봉을 휘두른다든지 맥락 없는 이야기로 빠져 정신없이 웃었던 기억이 있다. 수요일에는 십센치와 옥상달빛이 커버곡으로 대결하는 코너가 있었고, 임경선 작가의 고민상담시간도 있었다. 나중에는 디제이로 데뷔하게 되는 이동하는 청바지 이동진기자의 영화 코너도 있었다. 신청곡으로는 국내음악, 특히 유희열(안테나) 윤종신(미스틱) 등의 음악이나 당시 전성기라고 할만했던 홍대 인디밴드 음악들이 많았고, 자체 선곡으로는 장르와 국적을 가리지 않는 해외음악이 많아 은근히 듣는 음악의 폭을 넓혀준 것 같다.

https://www.youtube.com/watch?v=m6r6XUfoqhg&list=PL3PLdQhvAo-kPx8nOlFb7pl6VGC92DJim&index=3&ab_channel=%EC%9C%A0%ED%9D%AC%EC%97%B4%28YooHeeYeol%29-Topic


지나간 기억이라 해외음악으로 무얼 꼽긴 어렵지만 오히려 확실히 기억나는 건 중간광고로 나오는 서울사이버대학, 카페24에 이어 같은 방송국 프로인 굿모닝팝스 광고에 쓰였던 ordinary people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1qOFNXUpqC8&list=PL3PLdQhvAo-kPx8nOlFb7pl6VGC92DJim&index=4&ab_channel=JohnLegend-Topic


라디오천국 다음 시간은 라천의 윤성현PD가 디제이로 진행을 하는 심야식당이었다. 류이치 사카모토의 곡을 오프닝으로 사용했고, 내가 듣기 전에는 윤성현PD의 아바타 격인 TTS DJ 윌슨이 진행하는 올댓차트라는 프로였다는데, 기계음으로 시니컬하게 던져대는 독설로 유명했다고 한다. 이 성향은 인간 버전의 윤성현DJ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 듯, 조곤조곤 사연을 까는 매운맛이 있으면서도 또 심야식당이라는 제목에 맞게 위로가 되기도 하는 방송이었다. 월요일에는 빠르게 앨범 소개와 "오늘도 잘 챙겨 드세요"라는 클로징 멘트를 하고 한 앨범을 통째로 틀어주곤 했는데, 파업 때였는지 언젠가는 윤상을 찬양하며 윤상 전집을 정주행 하기도 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Gs_vGt0MY8&list=PL3PLdQhvAo-kPx8nOlFb7pl6VGC92DJim&index=5&ab_channel=DeccaRecords


이렇게 3시가 되면 kbs 라디오는 애국가를 틀고 정파시간에 돌입했고, 나는 그때까지 잠들지 않으면 옆 채널의 '보고 싶은 밤 구은영입니다'까지 듣고 나서야 이미 늦어버린 잠을 청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청취 패턴은 2011년도 하반기에 군 휴학을 하면서 어디 나가지도, 누굴 만나지도 않는 상황에서 더욱 고착화된 것 같다.

한 1년 하고 반 정도를 심야 라디오와 함께하는 밤샘 생활을 하던 2011년 11월. 라디오천국과 심야식당이 종영하고 최강희의 야간비행이라는 프로가 신설되었지만 내 취향에는 맞지 않았고, 그 뒷 시간에 송출된 나얼의 음악세계는 정말 제목에 걸맞게 아주 오래된 r&b나 소울, 난해한 재즈 음악들을 선보여 즐겨 듣지는 않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XpZHUVjQydI&list=PL3PLdQhvAo-kPx8nOlFb7pl6VGC92DJim&index=6&ab_channel=everythingchangesmoi


당시에 다른 채널에서는 12~2시까지 정엽의 푸른밤, 2시부터 3시까지 이동진의 꿈꾸는 다락방, 신해철의 고스트스테이션을 송출했는데 원래부터도 자주 여러 채널을 기웃거렸지만 두 프로그램의 종영 이후로는 kbs에서 mbc로 완전히 본진을 옮겨가게 되었다. 고스트스테이션은 신해철이 진행하는 전설의 라디오가 돌아왔다기에 몇 번 듣다가 짜증 난다고 삼태기메들리를 틀어버리는 혼돈의 광경에 충격을 받고 조금 더 정돈된 이동진의 방송에 거의 정착했고, 이후로는 푸른밤-꿈다방-보밤으로 쭉 이어서 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것도 며칠 안되어 입대일이 다가왔고, 약 2년간 심야 라디오와는 주말에 가끔 생각나면 듣는 정도의 사이가 되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N651hIvUwk&list=PL3PLdQhvAo-kPx8nOlFb7pl6VGC92DJim&index=7&ab_channel=DanalEntertainment

(삼태기 메들리는 20분이 넘는 대곡이기 때문에 부록에 첨부하였다. 유튜브 댓글에는 신해철을 그리워하는 사람들과 2017년 네이트 판 '삼태기 빌런'으로 유입된 사람들이 혼재되어있다. 아마 신해철이 살아서 다시 라디오를 했다면 분명 어느 날 이 사연을 언급하고 삼태기메들리로 방송을 마무리했을 것이다.)


군대를 갔다 온 이후에도 내 대학생활은 크게 달라진 것 없이 공부하는 폼만 잡고 새벽까지 빈둥거리며 놀기 일쑤였고, 심야 라디오 역시 다시 함께하게 되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zwKyXiSbi60&list=PL3PLdQhvAo-kPx8nOlFb7pl6VGC92DJim&index=8&ab_channel=%EC%98%A5%EC%83%81%EB%8B%AC%EB%B9%9B%2FOKDALOfficial


라디오천국이 있던 자리엔 장윤주의 옥탑방 라디오가 들어와 있었고, 전과는 조금 달라진 무드였지만 못지않게 즐겁게 들었다. 고정 코너 중에 캐스커가 나와서 옛날이야기를 했던 코너가 있었던 게 기억에 남는다. 당시에는 어려서 경험하지 못했던 90년대 PC통신 시절의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기도 했지만 왠지 모르게 공감하고 향수에 빠지는 느낌도 들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qC-LImr6vo&list=PL3PLdQhvAo-kPx8nOlFb7pl6VGC92DJim&index=9&ab_channel=%EC%98%A8%EC%8A%A4%ED%85%8C%EC%9D%B4%EC%A7%80ONSTAGE


이동진 기자는 이동진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프로로 돌아왔고, 더 늦은 새벽엔 김태훈 칼럼니스트가 진행하는 k의 즐거운 사생활이 있었다. 선곡은 라천 때와 비슷하게 국내 발라드 위주의 신청곡들과 작가들의 해외음악 선곡으로 이루어졌고, 이 때도 잘 모르던 외국 노래들을 많이 들었던 것 같다.


나중에 푸른밤에는 샤이니 종현이 쫑디라는 별명으로 디제이석에 앉았는데, 심야 라디오에 맞는 편안한 진행으로 매일은 아니었지만 가끔 지나가다 들러서 쉬어가듯 들었다. 오며 가며 들을 때마다 잘은 모르지만 착하고 멋있는 사람 같다는 생각을 하곤 했는데,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 종현의 갑작스러운 부고가 들려왔을 때에는 평소 샤이니나 가수 종현의 팬이 아니었음에도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YGep9XHl3ac&list=PL3PLdQhvAo-kPx8nOlFb7pl6VGC92DJim&index=10&ab_channel=JONGHYUN-Topic

2016년 초부터 졸업과 동시에 회사를 다니게 되었고, 새벽에 깨어있기가 어렵게 됨에 따라서 현재까지는 다시 심야 라디오와는 멀어지고 라디오는 외근이 있을 때 차에서 틀어놓는 정도가 되었지만, 이 글을 쓰면서 요즘에는 어떤 디제이들이 어떤 프로를 방송할까 궁금하기도 하고 12시 라디오쯤은 자기 전에 듣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심야 라디오의 청취자는 20~30대 여성이 많다. 그래서인지 대학교 때 심야 라디오를 들으면 혼자 듣고 있지만 친근하고 재미있는 누나, 형들이 옆에서 같이 듣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곤 했었다. 그때 사연을 보내던 누나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때도 지금도 모르지만 오랜 친구에 대한 그리움과 같은 감정이 피어오른다.

https://www.youtube.com/watch?v=_aj_c9odbZg&list=PL3PLdQhvAo-kPx8nOlFb7pl6VGC92DJim&index=11&ab_channel=JoJung-chi-Topic


또 되돌아보면 심야 라디오를 들을 때 나는 소위 말하는 청춘사업에 매진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착실히 청춘을 허비했다는 생각에 왠지 모를 뿌듯함도 느껴진다. 그 때나 지금이나 청춘의 올바른 사용법은 헛되이 써버리는 것이라 믿기에.

https://www.youtube.com/watch?v=RGKDkvBClRo&list=PL3PLdQhvAo-kPx8nOlFb7pl6VGC92DJim&index=12&ab_channel=Mongoose-Top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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