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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달글 Dec 31. 2020

[Parapluie] 보내지 못한 편지들

#01.


그곳 날씨는 어떠니? 이곳은 매일같이 비가 와. 구름을 짜내도 짜내도 아직 뭐가 더 그리 남았는지. 개천이 불어 터져서 삼촌네 돼지 몇 마리가 둥실거리며 떠내려갔대.

오늘은 계속 축축한 날씨 탓인지 사지에 힘이 빠져서 하루 종일 침대 위에 납작하게 붙어 있었어. 누워서 눈을 감으면 빗소리와 매미 울어대는 소리로 머릿속이 가득 차. 저놈의 매미들은 비가 와도 제 번식이 그렇게나 중요한지 도무지 멈추지를 않아. 한 귀라도 저 소리로부터 자유로워지게 하려고 모로 누워 오른 귀를 베개에 댔더니 왼쪽 귀를 통해 들어오는 매미소리가 다른 쪽으로 빠져나가지 못해서 뇌의 주름 사이사이를 채워버리는 것만 같아.


눈을 뜨면 안구를 통해서라도 소리가 빠져나갈까 봐 질끈 감은 눈을 살짝 뜨곤 해. 하지만 매앰-맴 소리는 여전해.


 소리를 삼켜보면 낫지 않을까 해서 침을 꼴깍 넘겨. 그 순간만은 목울대가 꿀렁이는 소리가 더 크지만 잠시뿐이야. 매앰-맴맴 찌르르르 소리가 두개골 안을 떠나가지 않아. 나는 눈을 감고 내 숨소리를 들으며 네 꿈으로 가득 찬 잠이 찾아오기를 기다려. 까마득한 세계로 까무룩 엎어지면 버텨야 하는 남은 긴긴 시간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겠지.

찌르, 찌르르 맴-매앰, 퉁퉁하고 시꺼먼 곤충이 날개를 비비는 소리와 배의 발성기관이 울리는 소리에 다시 정신이 돌아와. 엄지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내가 아직 이곳에 있음을 실감해. 눈을 뜨기 싫어서 닫고 있어. 어차피 시야에 들어오는 모습을 나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지긋지긋한 희고 깨끗하고 작은 천장, 그 아래 과분할 정도로 깨끗하게 정돈된, 닫힌 방.


#02.


출입문 닫습니다.


바로 문이 닫힐 것만 같아서 빠르게 포기하고 다음 열차를 타기로 마음먹었어.


출입문 닫습니다.


그런데 한번 더 출입문을 닫겠다는 거야. 이게 마지막 방송이 아닐까? 나는 망설였어.


출입문 닫습니다.


세 번째 기회찾아왔고 그제야 나는 발을 움직였어. 그런데 지하철 문 바로 닫버린 것 있지. 한 발자국만큼의 거리를 두고 승객과 나 사이에 벽이 생겼어. 안의 사람들은 멀리 가버리고 나는 플랫폼에 남았어.


이 세 번의 안내방송 사이에 나는 충분히 지하철을 탈 수 있었어. 세 걸음만 재촉하면 되었는데, 나는 그 앞에서 갈팡질팡하다 마지막 기회가 떠나갈 때쯤에야 겨우 발을 움직였고, 그래서 기회를 놓쳤어.


나는 여전히 이래. 잃기 싫어서 마지막까지 의연한 척 하지만 실은 망설이지. 망설이는 사이 잃고 싶지 않은 것들은 나를 두고 떠나가버려.


#03.


어제 이상한 꿈을 꿨어.


한강 위를 가로지르는 전차를 타고 있었어. 한강은 은빛 원반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전차 레일은 수면에서 매우 가까웠어. 전차가 지나가면 강물 위로 긴 꼬리가 생겼지.


나는 맨 뒤에서 두 번째 창가 자리에 앉았어. 맨 뒷자리에는 아기 세 명이 앉아 서로 장난을 치고 해맑게 웃으며 놀고 있었어. 두 살, 네 살, 다섯 살 쯤이려나.


나는 괜히 말을 걸었어. 이름을 물었지. 순응, 사랑, 소망이란다. 아니, 믿음 소망 사랑도 아니고 순응이 왜 들어갔지?라고 생각하며 부모의 작명 센스가 독특하다고 생각했어. 아이들은 맨발이었는데 그 통통한 발들이 너무 작아서 나는 아이들의 발을 만지작거리며 장난을 쳤어. 세 아이는 깔깔댔어. 그러다 문득, 순응이는 양 발에 발가락이 세 개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어.


꿈에서는 어떤 논리도 가능하지. 그 날 내 꿈에서는 가난한 나라에 제 자식의 신체 일부를 기부하는 부모들이 종종 있었어.


아이의 발을 물끄러미 바라보니 순응이가, 제 발가락은 다른 아이에게 있어요, 하고 별 거 아니란 듯이 답했어. 나는 당황한 기색을 재빨리 삼키고 아이에게 대단하다고 추켜세워봤지만, 아이는 우쭐거리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그저 미소 지었어.


#04.


어딘가에서 읽었는데, 인간은 태어나고 첫 다섯 해와 죽기 전 마지막 다섯 해에 대한 기억이 없대. 이 망각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에게 신이 주는 선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

그래서 이른 죽음이 슬픈가 봐. 자신의 죽기 전 찰나의 아픈 기억까지 모두 가지고 저곳으로 떠나야 하니까.


네가 오래오래 살다 갔으면 참 좋았을 텐데. 너의 마지막 다섯 해의 기억이 흐릿해져 소멸할 만큼만, 이곳에 남아있었더라면.


기억은 기약 없이 찾아와. 뜻밖의 장소에서, 특별하지 않은 모습으로.


어제는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해사하게 웃는 네 볼의 보조개가 선명히 떠오르지 뭐야. 저 집 빵은 비싼데 생각보다 맛은 없더라, 하던 모습이 눈 앞에 생생해서 무릎에 힘이 풀렸어. 별 거 아닌 기억에 신호가 초록 불로 바뀌고, 다시 빨간 불로, 다시 초록 불로 바뀌는데도 나는 앞으로 가지 못하고 주저앉아 엉엉 울었어.


#05.


하룻밤 사이에 기온이 쭉 떨어져 오늘 아침에는 영하 십이 도를 기록했어. 그리고 눈이 많이 왔어. 올해 비가 그렇게 왔는데 눈도 그만큼 오려나.


너랑 처음 이야기한 날을 떠올려. 눈이 오면 습관처럼 기억하는 것 같아. 십 년이 넘었네 벌써. 한 해가 또 가는데 기억은 숙성되지 않고 사진처럼 생생해. 


폐휴지를 버리는 길은 학교 건물에서 내리막길을 조금 걸어가야 했지. 종이박스 더미를 한 번에 버리겠다고 내 눈높이까지 박스를 쌓아 들고 가려고 했는데 삼선 슬리퍼가 문제였어. 헐렁한 슬리퍼가 벗겨진 탓에 결국 박스가 와르르 떨어졌고 하필 네가 거기 있었지. 너는 말없이 박스를 반 가져갔고 우리는 나란히 걸었어.


첫눈이네,


네 목소리가 정적을 깼고 정적 사이에는 흰 눈이 하나 둘 내리고 나는 그 순간이 영원하길 기도했어.


#06.


너를 보내고 난 다음 날보다는 둘째 날이 가장 힘들었어. 첫째 날에는 오후 두 시에 일어나 네 시에 사람들을 만나 다음 날 새벽 다섯 시까지 놀았어. 슬픔이 나를 계속 재우려 해서 어떻게든 타인과 있으려 했어. 


결국 피로에 지쳐 잠으로 도망치려는데 네가 준 나무가 여전히 내 방에 고요히 잠들어 있었고 나는 다시 가슴이 너무 아파서 몸을 잔뜩 웅크렸어. 웅크리다 보면 사라질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면서, 생각하지 않으려 잔뜩 애썼어.


시간은 기억의 맷돌이라는데, 언젠가 모든 것은 빛이 바래고 희석되고 사라지겠지. 이 편지도 언젠가는 끝이 날 거야. 다만 아직은 쓰고 싶은 말이 마음에 흘러넘쳐서, 이 강이 고갈될 때까지만 마음껏 슬퍼하고 그리워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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