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인생 시작
18년 5월 처음으로 팀을 배정받았다. 그때는 부서 배치가 얼마나 큰 일인지 몰랐고, 그 일이 나를 설명하는 수식어가 될 줄은 몰랐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쉽게 나에 대해 소개하는 방법이 내 직업을 얘기하는 것이다. 누군가 어떤 일 하세요 하면 "반도체 연구개발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설명을 하지만 진정한 연구개발인지 모르겠다. 대학원에서 직접 실험을 하고, 직접 분석을 하고, 직접 결과 정리를 했던 것과는 다르게 현재는 실험도 분석도 모두 요청을 하고, 결과 정리만 하고 있다. 이걸 연구개발이라 할 수 있나 생각하고 있지만, 반도체 개발에 대해 아는 선에서 설명을 해보자면 반도체를 만드는 일에는 크게 4종류로 나눌 수 있다.
1. 설비담당
2. 8대 공정담당
3. 제품 관리
4. 분석
설비와 8대 공정담당에 대해 사실 자세히 알지 못한다. 아는 바를 정리해 보자면, 기계적으로 설비의 유지보수 및 정상 작동에 대한 관리는 설비담당에서 하며, 해당 설비에서 원하는 구조를 구현하기 위한 recipe에 대한 부분을 8대 공정 담당자들이 한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구조들로 전자들의 이동통로를 만들어 메모리 칩들이 생산되는 것인 만큼 현미경 등을 통해 원하는 구조대로 구현이 되었는지 확인하는 분석 파트가 생각보다 굉장히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여기까지가 내가 곁눈질로 파악해온 일들이고 내가 하는 일은 저 중에서 제품 관리라고 불러야 하는지... 사실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자세히 알지도 못하는 8대 공정에 대해 "a를 만들어 주세요"라고 요구해야 하는 업이라 처음에는 혼란스러운 점도 많았던 것 같다. 알지 못하니 당당히 요구할 수도 없으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요청만 하다 보니 이 일이 필요 없는 일 같아 요구하면서도 항상 너무 죄송했고, 요청하는 것이 내 업인가 라고 생각을 하며 1년이 지났다. 그러고 팀을 이동했다. 사실 상 하는 일은 같다고들 하지만, 제품 개발단계가 바뀌었다. 그리고 느낀 바로는 아예 다른 일이다.
한 제품의 개발 단계는 크게 연구-개발-양산 이렇게 3단계로 나뉜다.
연구단계에서는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이다. 근데 그렇다고 다 새로 할 수 있는 것은 또 아니다. 지금까지 한 제품들의 이전 버전을 바탕으로 다음 제품의 대략적인 spec을 정하고, 이를 구현하기 위해 어떠한 것들을 바꿔야 하는지, 그래서 일단 진행해 본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최대한 문제가 되지 않는 선에서, 계속적으로 실험을 하는 거지. 근데 이 실험이라는 게 대조군이 항상 있어야 하다 보니 모든 걸 처음부터 할 수는 없다. 항상 이전 버전과 비슷하게, 크게 다르지 않게. 그래서 하다 보면 처음이라고 하지만 처음이 아닌 기분이랄까. 그렇게 최대한 모래를 깔고 맨땅에 헤딩을 하다 보면 점차 안정화가 되고, 그렇게 작동하는 chip이 생기고 수율 40% 정도 달성하면 정말 할 일 다 했다 할 수 있다. 그러면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개발단계에서는 어느 정도 조건이 잡혔지만 수율 40%는 돈이 되지 않기에 돈을 더 투자해 수율을 더 끌어올리기 위한 평가와, 돈을 추가적으로 아낄 수 있는 item 들을 발굴하고 평가해본다. 이때부터는 안정성이 어느 정도 확보되었기 때문에 양산 라인에서 평가를 진행할 수 있다. 물량도 연구단계와는 비교가 되지 않게 많고 대량으로 평가를 할 수 있기 때문에 각 item들에 대한 결과 정리도 훨씬 쉬워진다. 이 단계에 아직 나는 가보지 않아서 정확히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물량이 많은 만큼 일이 많고 가장 아래에 있는 사원 나부랭이들은 그 모든 벌린 item들에 대한 결과 정리를 모두 해야 하므로 그만큼 업무량이 어마 무시하다고 곡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그만큼 고속성장한다고도 하고... 회사에서 근데 성장할 필요가 있는지 회의감이 드는 요새지만..! 그렇게 온갖 item들을 적용해 수율을 80% 정도 끌어올리면 이제 다시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양산단계에서의 목표는 최대한 많은 chip을 안정적으로 생산해 판매량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수율 80%가 낮은 수율은 아니지만 끌어올릴 수 있는 최대치로 끌어올리기 위한 평가들을 하는 것과 동시에 가능한 공정 진행에 문제가 없어 안정적으로 수익을 내는 것을 동시에 진행해야 한다. 따라서 양산 단계에서도 제품이 넘어온 직후와 수율이 95% 정도 나오는 때의 상황은 많이 다른 것 같다. 개발단계에서 넘어온 직후의 제품은 개발단계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예상한다. 오히려 더 할 것이다. 왜냐하면 수율이 조금만 떨어져도 위에서부터 회의부터 원인 확인을 위한 온갖 자료 작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느 정도 안정적인 수율을 제공하는 제품들은 원하는 공급처가 있다면 그렇게 꾸준히 제품을 생산한다. 이때부터는 투자비는 거의 없이 수익만 창출하는 진정한 cash cow가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최소의 공급으로 최대한의 수익을 창출하기 위한 tight 한 관리를 한다. 이 업무를 개발업무라고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동일한 직군이라 연구/개발/양산 3 단계를 사람들이 제품에 따라 옮겨 다니는데 각 업무마다 이마저도 성향이 확실히 나뉘는 것 같다.
예전에 정전사고로 반도체 회사에서 큰 손실을 봤다는 기사가 난 적 있었다. 이런 사고가 한 번 발생하면 양산 라인에서는 어떤 물량이 그 시점에 설비에 있었는지 확인하고, 그 물량이 그대로 제품화되었을 때 신뢰성이 어느 정도 확보가 되는지, 등등 모든 확인 후에 폐기할지 하위 거래처로라도 물량을 넘길지 등등 고민이 시작된다. 이때 제품 관리하는 업무로는 이런 고민을 하지만, 이때 설비는 설비가 정전으로 멈췄을 것이기에 다시 정상 작동할 수 있도록 해야 하며, 공정 담당자는 동일 recipe가 이전과 동일하게 구현되는지 확인이 필요하며, 이러한 모든 확인 작업들은 현미경을 이용한 온갖 분석방법이 총동원된다.
현재 업무를 하면서 느낀 바는 사실 상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간접적으로, 경험적으로 아는 것들을 잘 정리하고 축척해가면서 실제로 아는 사람들을 상대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이 든다. 그래서 업무를 하다 보면 위에 사람들이 경험적으로 그렇다고 하면 그냥 할 말이 없다. 그것을 그들에게 증명해달라 할 수도 없으며, 나의 의견이 무시당하는 것에 대해 나도 반박할 수 없다.
처음 입사해서는 양산 단계에서도 수율이 매우 안정화된 단계였다. 사실 그냥 신입은 제품이 어디 있든 그냥 당장 시키는 것을 하기 급급한 것 같다. 이제 와서 되돌아보면 그 단계에서는 내가 더 알아가는 게 쉽지 않았겠다 생각하지만 그 당시엔 그마저도 매우 벅찼으니까.
그러고 팀을 옮기고서는 연구단계에서도 main 단계였어서 지원이 매우 부족한 연구소임에도 그 부족한 지원을 몰빵 받아 큰 어려움이 없다 생각하며 일했다. 그래도 새로운 평가들을 할 수 있어 재밌었고, 아무도 하지 않았던 걸 처음 하는 것이라 흥미로웠고.
그리고 현재 옮긴 팀에서는 연구소에서도 차차차 세대 제품 연구개발 단계로 어느 누구의 관심도 지원도 없는걸 콘크리트부터 부어서 맨땅부터 만드는 느낌이랄까. 이 마저도 처음엔 즐거웠던 것 같다. 그리고 어찌 됐든 간접적으로나마 실험을 할 수 있는 연구 단계에서의 업무가 가장 나와 잘 맞다고 지금까지는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역시 회사에서 일보단 사람이고, 일이 정말 좋지 않은 이상 사람이 나쁜걸 일로 극복할 수는 없을 것 같은 한계에 다다른 요즘이다. 과연 앞으로 나는 어떻게 변할지, 그리고 그때의 나는 이 글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할지 기대가 된다.
벌써 회사에 들어와서 일을 시작한 지 2년이 훌쩍 넘었고 곧 만 3년을 채운다. 노트북이 없다는 이유로 글을 매번 차일피일 미뤄왔는데 꼭 올해가 가기 전에, 3년 가까운 시간 동안 한 일들에 대한 정리를 하고 싶어 pc방에 와서 글을 남기며, 위에 적은 바는 저의 생각에 불과하며 이 길고 장황한 글을 읽으신 분들 중에 틀린 사항이 있다 생각되시면 f/b 부탁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