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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달글 Jan 24. 2021

[미스트] 16,347원짜리 여행

약속을 잡기도 미안한 요즘 혼자 뒹굴거리는 것도 지겨워질라치면 교보문고에서 한 두시간 머물다 온다. 무료하지 않으면서도 눈치 보지 않고 몇 시간씩 머무르기엔 책 많은 곳만큼 좋은 곳도 없다. 서점이든 도서관이든 책방이든 책 많은 곳치고 아주 야박한 곳은 없는 듯해서 책을 사지 않는다고 눈총을 받거나 면박당하는 일이 없다.


짧막한 인생 중간중간마다 내 맘대로 속으로 찜꽁하고 자주 들렀던 곳들이 있다. 초등학생 땐 지하철역 근처 골든 서점, 중고등 학생 땐 학교 근처 Yes서적문구, 대학생 땐 학교 중앙도서관과 영풍문고, 사회인이 선 최인아 책방과 교보문고가 그들이다.


특히 애정이 갔던 곳은 아무래도 어릴 때 자주 갔던 골든서점인데 지금 생각하면 이런 민폐 손님이 있나 싶다. 지하 1층이라 안 그래도 손님도 별로 없는데 여름이면 에어컨 바람 쐬러 들러 몇 시간을 죽치며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주로 만화나 그림이 많은 책을 봤는데 짧은 시간 안에 엑기스인 내용은 싹 다 읽을 수 있어서 책을 살 필요가 없었다. 흐릿한 기억 속 그림체가 남아있어 2000년대 책이라고 검색해보니 그 시절의 책들이 더 선명히 떠오른다.

당시 이런 시리즈물이 유행이었다. 엑기스 에피소드만 되풀이해서 읽고 사진 않았다
<삼성어린이세계명작 14 장발장> 골든서점에서 구매했던 책 중 하나. 깔끔한 이미지는 구할수가 없다.

그렇게 정을 붙여 들락날락하던 곳이었는데 어느 순간 기독교 서적 전문 서점으로 바뀌어버렸다. 당시 나에겐 너무 어려운 책들뿐이었고 어느 순간부터 발길을 끊게 되었다. 어찌나 아쉬웠던지 혹시 다시 돌아오진 않았을까 몇 번을 서점을 들렀다 그냥 나왔는데 나중에 서점 자체가 닫고 말았다.


입사 직전엔 선릉역 인근 최인아 책방을 자주 갔다. 책방이지만 화장실이 예뻐 좋았고 다락방 같은 2층 구조도 특색있게 느껴졌다. 1층은 카페가 있고, 참여해 본 적은 없지만 캘리그라피나 강연 같은 행사도 여는 듯했다.


무엇보다 작은 공간임에도 책상 딸린 1인용 의자들이 있는 게 맘에 들었다. 물론 1인용 의자는 자리가 금방 찼다. 맘먹고 들렀다 빈자리가 없으면 혹시 자리가 나지 않을까 근처 책꽂이를 서성이며 기회를 노리다 결국 포기하고 책방을 나와버린 날도 있다.


마지막으로 방문했을 땐 구매한 책이 아니면 2층으로 가져갈 수 없게 되었고, 1층에 계속 서 있기엔 카페 직원의 시야에 한눈에 들어와서 나에겐 오래 머물기엔 조금 버거운 곳이 되어버렸다. 누가 눈치 안 줘도 알아서 눈치를 보는 나에겐 이것도 부담스럽다.


하지만 아직 나에겐 강남 교보문고가 남아있다. 이런 대형서점의 장점은 바닥에 퍼질러 앉아도 눈치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지하 2층에 아동 코너와 핫트랙스를 몰아둬서 지하 1층은 붐비더라도 상대적으로 한적하다. 나란히 폴바셋도 있고 같은 건물에 스타벅스도 있기 때문에 커피를 마시거나 노트북을 쓰고 싶어도 문제없다. 이렇다 보니 보통 지하 1층에만 머물다 온다.


이렇게 서점을 좋아하지만 민망하게도 책을 많이 읽는 다독가는 아니다. 내 기억에 책을 많이 읽는 친구들은 그 시끄러운 수업 쉬는 시간에도 자리에서 책을 읽고 심지어 수업 시간에도 책을 읽다 선생님께 혼이 났다. 반면 나는 그렇게 열정적으로 책을 읽은 기억은 없고 유명한 작가나 책을 논할 만큼의 식견도 없다.


단지 책으로 둘러싸인 곳에 있으면 괜히 기분이 좋아서 그런 곳을 찾아다니길 좋아하고, 표지가 이쁘거나 제목이 맘에 들어서 아니면 그냥 재밌어 보이면 책을 집었다 내려놓길 반복하는 편이다. 그러다 가끔 굳이 서점 귀퉁이에 앉아 졸다 깨서는 의도된 것 마냥 벌떡 일어나기도 한다. 이런 걸 보면 독서 자체보단 책이 있는 공간에 있는 걸 좋아하는 건가 싶다. 그럼 대체 왜 책이 있는 곳이 마음이 편한가는 확실한 답을 찾진 못했다. 여튼 지금도 마음 불편한 일이 있으면 서점을 자주 찾는다.


서점을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은근한 재미가 있다. 매대에 올라와 있는 책들의 표지와 편집상태만으로도 요새 어떤 색과 글자체가 유행인지 느낄 수 있다. D, E, F 온갖 섹션을 넘나들다 보면 과학, 경제, 인문 이 세상 모든 얘기가 왁자지껄 떠들어대는 기분이라 무료함에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각 코너에 어떤 연령대나 성별의 사람들이 몰려있나 구경하는 것도 쏠쏠한 재미다.


그렇게 서성이다 눈길을 잡는 책을 집어 든다. 책은 참 자애롭다. 자신을 들여다보고자 하는 이라면 그 누구에게든 품은 내용을 온전히 까보여준다. 몇 페이지 읽다 지루해 덮어버린 데도 끈기가 없다느니 좀 더 봐보라 채근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언제든 맘 편히 서점을 방문하게 되는데 처음엔 베스트코너 쪽을 지나치지만, 나중엔 사람들이 덜 몰리는 섹션을 찾아 구석진 책꽂이를 훑어본다. 왠지 사람들의 주목을 못 받은 수많은 책들이 안쓰러워서 눈길로라도 한 번 어루만져본다. 착한 사람에겐 더 착하게 대하고 싶은 마음 같은 게 발동해서가 아닐까 싶다.


일상을 잘 보내고도 아주 가끔 꼭 살아야 하나? 라는 의문이 든다. 지금 상황이 절망적이고 죽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서가 아니라 왜 죽으면 안 되는 걸까라는 질문이 머릿속에 띵 떠오를 때가 있다. 그러다 책이 많은 곳을 가면 죽지 말아야 할 이유를 넘어 어떻게 건강히 오래 잘 먹고 잘살며 더 많은 걸 해볼 수 있나를 고민하게 된다.


아직 내가 뜯어보지도 못한 선물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지금 죽으면 너무 한스럽지 않을까라는 삶의 의지가 꿈틀댄다. 특히 맘에 드는 책을 만나면 단 몇 페이지를 읽는 순간만으로도 다른 어딘가로 머리끄댕이가 확 잡아채지는 기분이다. 그럼 순간적으로 내 모든 일상과 현실에서 떨어져 나와 작가가 이야기하는 세상을 잠시 다녀오는 것만 같다. 내 뜻대로 되는 것 하나 없는 날일수록 이런 순간적인 환기가 주는 효과가 극대화된다.


검색해보니 2018년도 기준 도서 평균단가가 16,347원이란다. 사실 서점에 가도 책을 사는 경운 적어서 내가 누린 효용에 대해 지불하는 비용은 0원에 가깝다. 이렇게 값싸게 짤막한 여행을 할 수 있다니 안 가는 게 손해다. 올해는 코로나가 종식되길 간절히 바란다만 그렇지 못한대도 아직 갈 곳은 있는 것 같아 조금은 마음이 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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