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것을 사랑한다는 것
영화 <연인> 영화 리뷰영화 <연인> 리뷰영
[영화 "연인" 리뷰]
<봄을 기억하는 겨울나무>
영화 <연인>은 프랑스의 소설가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자서전적 소설이 원작이다. 1920년대 후반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이 배경이다.
영화는 할머니가 파리에서 옛날을 회상하며 만년필로 글을 쓰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내 삶은 어렸을 때 이미 늦어(late) 버렸다. 열여덟에 이미 늙어 버렸다... (중략)
나이가 드는 건 잔인하다. 세월이 지나면서 외모는 차차 일그러졌지만 겁먹기보다 마치 책 읽는 것처럼 변해가는 얼굴을, 흥미를 갖고 지켜보았다. 나이 든 내 얼굴은, 윤곽은 그대로였지만 볼품이 없어졌다. 내 얼굴은 망가졌다. “
<불행한 가정>
주인공 소녀는 당시 프랑스 식민지였던 베트남에 사는 백인(프랑스인)이다.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엄마와 오빠, 남동생과 살고 있다. 소녀의 가정은 불행했다. 엄마는 아빠가 물려준 재산을 사기꾼에게 날려 가난했고 무기력했다. 엄마는 큰오빠만 편애했다. 큰오빠는 폭력적이고 마약을 하느라 돈까지 훔쳤다.
엄마가 이야기하듯 ”항상 너무 심각했고 오랫동안 기쁨을 잊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게 우리의 습관이 되었다. “ 집은 악몽 같고, 슬픔, 가난, 수치, 공포, 비열하고 끔찍하고 견디기 힘든 곳이었다.
주인공 소녀는 늘 조금 슬프다. 그녀의 오래된 연인은 슬픔이었다.
<첫사랑>
15살 반 소녀는 방학이 끝나 기숙사로 돌아가기 위해 메콩강을 건너는 배를 탄다. 가슴과 등이 깊이 파인 헐렁한 낡은 원피스에 중절모, 낡은 댄스 구두에 립스틱을 비뚤게 바르고 배 난간에 기대서 있다. 황량한 환경에서도 이제 시작되는 자신의 색깔을 표현하려는 듯하다.
운전기사가 딸린 검정 리무진이 배에 비집고 들어온다. 흰색 정장을 입은 중국인 남자가 차에서 내린다. 그는 소녀에게 다가와 긴장한 모습으로 말을 건넨다.
중국인 남자의 제안에 소녀는 배에서 내린 후 기숙사까지 그의 차를 타고 간다. 중국인은 대부호의 아들이다. 며칠 후 남자는 시내에 있는 '독신자의 방'으로 그녀를 데려간다. 남자는 소녀를 좋아하고 아직 어려서 망설이지만, 소녀는 남자에게 '다른 여자에게 하듯이' 해달라고 한다. 결혼으로 이어지기가 어려울 것 같지만 소녀는 쿨한 척한다. 둘은 그 후 일여 년 육체적 쾌락을 즐긴다.
중국인은 소녀의 가족을 만난다. 가족 앞에서 그녀의 행동은 달라진다. 가족 앞에서 그는 아무것도 아닌 물주일 뿐이고, 단지 돈 때문에 만나는 것이다. 수치스럽고 숨겨야 하는 존재다. 소녀가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게 해서는 안 된다.
가족에게 자신의 진정성을 들킨다면 그녀의 사랑은 조롱과 유치함으로 전락할 것 같다. 엄마는 돈이 필요해 둘의 관계를 묵인하면서도 어떤 날은 그녀를 때리기도 한다. 학교에서는 돈 많은 중국인 남자를 만난다고 소문이 나며 따돌림당한다.
가족에게는 물론이고, 중국인 남자에게도 돈과 육체적 쾌락 때문에 만나는 것처럼, 스스로에게도 쾌락을 즐기는 것뿐인 양 소녀는 행동한다. 하지만 소녀와 남자는 '연인'이었다.
중국 남자는 정혼녀와 결혼하고, 소녀는 프랑스로 떠나야 한다. 프랑스로 떠나는 배를 타고, 처음 만났던 때처럼 난간에 기대서 있던 그녀는 저 멀리 검정 리무진에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옛 애인의 형체를 본다. 차가 안 보일 만큼 멀어졌을 때, 배 안에서 피아노 소리(쇼팽의 왈츠 10번)가 들린다. 무엇엔가 홀린 듯 그 소리를 따라 지하로 내려가던 소녀는 오열한다.
소녀는 그 남자를 사랑하고 있었다.
<쾌락만 허용되는 남자>
33살, 남자는 소녀를 사랑한다. 소녀와 결혼하기엔 중국 관습과 맞지 않고, 이미 집안에서 정한 정혼녀가 있다. 아버지는 그에게 시내에 독신남의 방과 가구, 자동차, 돈, 여자... 등 욕망과 쾌락을 마음껏 누리도록 해준다. 그는 시간도 많아서 사랑만 한다. 하지만 허락되지 않는 하나가 있다. 진실한 사랑과 결혼하는 것.
남자는 아버지에게 소녀와의 결혼을 청해 보지만, 그의 아버지는 그가 정혼녀와 결혼하지 않고 소녀와 결혼한다면 한 푼도 주지 않겠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를 떠나지 못한다. 사랑을 지킬 힘이 없다.
남자는 처음부터 소녀가 좋았다. 그녀가 자기를 따라온 것이 돈 때문이 아니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는 돈 때문에 사랑을 떠나야 했다) 조금 지나서는 그녀를 사랑하는 게 외롭다고 울면서 말한다. 마지막 밤에는 그녀를 지우지 못할 것 같아서, ”자기를 만나는 것은 돈과 쾌락 때문이었다. “라고 그녀에게 말해달라고 한다.
<쾌락이 아닌 사랑>
영화의 마지막은 다시 처음 장면으로 돌아가 할머니가 회상하며 글을 쓰고 있다.
중국 남자는 그녀에게 전화했다. 그녀가 글을 쓰는 작가가 된 것과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이혼한 것. 남동생이 죽은 것을 알고 있었다.
"예전에 그랬듯
그때처럼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고
죽을 때까지
사랑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어떤 가정은 절대로 말하지 않는 이야기가 있다. 극복하지 못한 불행에 대해 말하는 것은 암묵적인 금기다. 불행이란 희망, 사랑, 소중함, 진실함, 기쁨.. 그런 것에 대한 좌절이다. 그런 것을 모두 포기해야 한다. 부정적 감정을 억누르면, 다른 감정도 느끼지 못한다. 진실은 이야기하지 않고 거짓 자아(ego)로 서로를 대한다. 거짓 자아로만 살아온 가족에게 진정성을 내보인다는 것은 발가벗은 모습을 보이는 것처럼 수치스럽다. 진실한 자기(self)를 드러내서 비웃고 조롱받을 때처럼 상처받는 일도 없다. 사랑하는 것을 느끼지 않고 이야기하지 않는 게 불행을 버티는 힘이다.
불행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은 건강한 사랑을 만들어 가는 게 어렵다. 행복을 표현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일 힘이 없다. 사랑할 때는 두려움도 함께 오는데, 사랑이 두려움을 이기는 데 불리하다.
15살 반, 이른 나이 같지만, 당시 유럽은 좀 빨랐던 걸 고려하면, 이제 막 사랑에 눈뜨기 시작하는 나이다. 내면의 소리를 듣는 순수한 진정성이 있어 특별한 때다. 생명력과 개성이 의도하지 않아도 내면에서부터 꿈틀대며 현실에서 외현화하려 한다. 당황스럽기도 하고 새로운 미래가 기대도 된다.
사랑을 한다는 건, 주변 여건이나 능력 등 잠재된 자신의 약점과 주어진 한계들에 머물 것인지, 세상을 향해 자신의 세계를 펼칠 것인지의 문제가 극복해야 할 과제로 주어진다.
첫사랑을 할 나이에는 가족으로부터 독립도 안 돼 있고, 힘과 능력도 없다. 하지만 무모한 열정이 있어 도약이 가능하다. 그것이 어렵다고 느껴지면 포기하고 시작도 못 한다. 아니면 왜곡된 사랑을 한다.
돈이나 육체적 욕망을 진실한 사랑인 척하는 경우는 많다. 소녀와 남자가 처음 만나는 날, 하얀 옷을 차려입은 장관 부인이 배에 탄다. 남자는 소녀에서 "저 여자 때문에 젊은 남자가 자살했다면서요?"라고 묻는다. 소녀와 남자가 헤어졌을 때, 소녀는 다시 그 장관 부인과 엇갈려 지나간다. 아마도 장관 부인은 진실한 사랑을 가장해, 젊은 남자에게는 육체적 욕망을, 남편에게서는 부와 권력을 충족했을지도 모른다.
소녀와 남자가 만날 때와 헤어질 때, 장관 부인의 등장은 그들의 사랑을 암시하는 복선이다. 하지만 소녀와 장관 부인은 반대다. 장관 부인은 사랑을 가장해 쾌락을 채우지만, 소녀는 쾌락으로 사랑을 절제한다. 주변의 시선과 모욕을 견디고, 가족, 남자, 스스로에게조차 진실한 사랑을 부인한다. 이루기 힘든 사랑에 대한 자존심 때문이고, 슬프지 않기 위해서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처절하게 실패한 자기 모습을 보기엔 자존심이 상한다.
쾌락 뒤에 사랑을 감추지 않았다면 장관 부인의 젊은 애인처럼 자살했을지도 모른다. 소녀는 자살하지는 않았지만, 첫사랑과 함께 꽃 피우려던 자신은 그때 시들었다.
소녀와 남자는 둘 다 원가족에서 주는 한계에서 극복하지 못했다.
사랑을 찾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안락한 삶을 찾느라 내면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실패도 없다. 그에 비하면 소녀는 장점이 많다. 동화처럼 결혼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짧은 첫사랑이었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순수하게 올라오는 내면의 소리에 충실하고 개성과 색깔이 있다. 관습과 환경의 한계는 극복하지 못했지만, 남자의 무능함을 원망하거나 판단하지 않는다. 단지 좋아하고 받아들인다. 실패할 것이 보여도 실패할 용기가 있다. 타인의 시선을 견뎌내고 사랑하는 대상을 사랑한다. 환경 때문에 왜곡된 사랑이라 아쉽지만 주체적이다. 그런 자기다움과 주체성은 관능을 제외하고도 소녀의 매력이다.
젊음의 아름답고 건강한 모습은 관능적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나이가 들면 외모가 변한다. 누군가 나이 든 모습을 사랑해 줄 것 같지도 않고, 기대도 안 한다. 첫사랑을 다시 만나고 후회하는 예도 많다. 젊음이 사라지고도 처음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드물다.
소녀는 어린 시절 불행했고, 첫사랑은 굴욕스럽고 현실로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특별한 첫사랑은 과거에 갇히게도 하고, 이루지 못한 과거는 시간을 견디며 나이 들게 한다. 열여덟에 이미 늙어버린 삶이고 정말 나이도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불행 속에서도, 젊음이 가도 변함없는 영원한 사랑을 멀리서나마 하고 있다.
삶이 안전하고 안락하기만을 바란다면 주인공의 참다운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현실에서 완전한 모습으로 사랑을 실현시키지는 못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지만, 성장과 사랑을 체험할 수 있다. 실패한 첫사랑은 깨진 유리처럼 돌이킬 수 없고 조각나 있고 상처를 주는 파편이다. 그러나 황량한 삶이었다고 해도 순수한 첫사랑은 삶의 빛나는 조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