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대림도서관에서 저녁 강의를 들었다. 자전거를 타고 도림천에서 안양천을 돌아 집으로 온다. 맑은 공기와 시원한 바람이 피부를 스친다. 그 여름이 지나 가을로 접어들 무렵, 밤공기는 더욱 맑고 시원해진다. 풀벌레 소리가 현재에 더 집중하게 만들면 과거도 미래도 잊고 세상이 고요해진다. 그 소리를 듣고 있으니 마음도 잠잠해졌다. 이대로 한강까지 나가 밤을 지새우고 싶다. 어느 여배우가 말했듯 ‘아름다운 밤이다.’
멀리에는 고층 건물 불빛이 보인다. 천(川)을 끼고 수풀 사잇길을 달리면, 낮의 일들이 하나의 드라마처럼 스쳐 간다. 사람들이 지어낸 드라마에 내가 등장인물이 되어야 하는 낯선 세계다. 늘 오가는 이 길은 하늘이 넓어, 달과 별이 나를 내려다본다. 오후의 억울함을 나보다 더 잘 아는 듯 위로해 주는 느낌. 가슴이 풀어지는 것만 같다. 마음을 무겁게 누르던 세속적 세상과는 다른 차원의 진짜 세계가 펼쳐진다. 드라마 속 이야기가 아니라, 이것이 내가 속해야 했던 세계다.
그런 밤을 지나면 문득 깨닫는다. 기쁜 일 중 나는 ‘혼자 하는 기쁨’을 즐긴다는 걸. 사람을 만나 즐겁게 지내기도 하지만, 내성적인 성격이라 혼자 에너지를 충전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자전거 타기, 그림 그리기, 음악 듣기 등 혼자 몰입할 수 있는 일들로 보내는 시간이 다시 내 마음을 정화시킨다. 고요하지만, 그 안에는 분명하고 작은 생동감이 있다. 고독 속에서 번잡한 일들이 사라지고 진정한 ‘나’를 만나 순간을 오롯이 즐기게 된다.
고독을 자처하는 또 다른 이유로는 여러 사람과 만남 후에는 허무한 느낌이 들거나 가슴 아픈 일도 생기기 때문이다. 때론 능력을 발휘하고 인정도 받지만, 질투, 열등감, 무시, 경쟁에 휘말리는 일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외부에서 보는 ‘나’는 상대방의 과거 경험, 두려움, 욕망으로 그려진 드라마 속 등장인물이다. 칭찬이건 비난이건, 진정한 ‘나’와는 차이가 있다. 타인은 공감이나 도움을 주고 동지 의식도 느끼게 하지만, 잦은 오해는 혼자일 때보다 깊은 외로움을 느끼게 만든다.
혼자일 때의 고독과 사람들 사이에서의 외로움은 차이가 있다. 고독은 나와의 만남이고, 외로움은 타인과의 거리다. 고독은 보여지는 모습이 아닌 내면과의 소통이지만, 외로움은 내면이 소외된 이해받지 못하는 상태다. 고독은 진정성이 있지만, 외로움은 편견이나 오해 때문에 발생한다. 사람 사이에서의 외로움을 달래줄 수 있는 것은 나와 만나는 고독이다. 고독에서 기쁨을 찾는 건, 사회성이 부족해서만은 아니다. 고독 속에서 나를 만날 줄 아는 사람이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신의 진정성을 보여 줄 수 있고, 다른 사람의 진실한 내면과도 사귈 수 있다.
세상이 만든 관계와 조건에 지칠 때가 있다, 모두가 잠든 시간 창밖의 별과 달 아래 나만의 공간에서 고독하게 존재하며 취미활동을 하는 것이 나의 기쁨(喜)이다. 칭찬과 비난, 우월감과 열등감 같은 감정으로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실패의 두려움, 성공이나 결과에 대한 집착 없이 진실한 나를 만날 수 있다. 능력이나 결과를 인정해 줄 사람은 없다. 오히려 그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그 순간이, 나를 더 자유롭게 만든다. 때론 목적 없는 무의미한 시간 같기도 하지만, 목적이 없기에 순수한 가치가 있다.
고독이나 외로움을 느끼는 건 ‘나의 고유성’ 때문일지도 모른다. 타인과 다르게 빚어진 고유한 결이 때로는 나를 고독으로 이끌고, 그 고독 속에서 다시 나를 만나는 기쁨을 느낀다. ‘다른 고유성’이 사회적 역할을 말하는 건 아니다. 사회적 역할은 일정한 유능함을 요구하며, 필요하다면 다른 사람으로도 대처될 수 있다. 그러나 ‘나의 고유성’은 유능·무능으로 평가할 수 있는 도구적 가치의 범주를 넘어선다. 타인에게 보이는 겉모습이나,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낸 관념의 이미지도 아니다. 사람을 만날 때 나이, 직위, 외모, 재산 같은 외부적 표지로만 그를 판단할 때가 있다. 하지만 한 사람을 깊이 사귄다는 것은 그런 현상을 벗고 그 너머를 보는 일이다. 고독한 시간은 바로 그 깊이로 향하는 통로다. 고독은 나를 돌보는 시간이며, 진실한 나를 만나는 약속이다. 그건 나와의 ‘설레는 데이트’이자, 조용한 환대의 시간이다. 오늘도 나의 중심에서 조용히 피어오르는 기쁨 하나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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