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樂, 사랑 편)
운전면허와 여권을 갱신할 때가 됐다. 사진이 필요했다. 나이가 들면서 내 사진을 찍는 것이 싫어서 계속 미뤘다. 그러다 연말이 다가와서야 서둘러 사진을 찍으러 갔다. 화장을 안 하고 다닌 지도 오래되어 화장하기도 귀찮았다. “요즘 보정해 주는데 뭐.”라고 위안하며 화장을 조금만 했다.
구청 앞을 가니 문구를 팔거나 복사 가게 같은 분위기의 사진관이 있었다. 주인이 다른 손님에게 “여기가 다른 집보다 싼 거 아시죠?”라고 말하는 걸 들었다. 사진이 못 나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잠깐 들었지만, “싸면 좋지. 그냥 사진만 나오면 되지.”라고 생각했다.
사진을 찾으며 주인아저씨께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지만, 막상 사진을 보았을 때는 충격이었다. 나는 아버지를 조금 닮긴 했어도 다르게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내 사진 속 모습은 아버지의 주민등록증 사진과 같았다.
오래전의 일이다. 가족으로 묶인 핸드폰 요금제를 해지하려고 아버지의 주민등록증이 필요했었다. 어린 시절, 나는 가족을 책임 있게 보살필 줄 몰랐던 아버지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내가 분가한 뒤 아버지는 시골로 내려가 계셨고, 나는 거의 찾아가지 않았다. 어렵게 받아 든 주민등록증 속 아버지의 사진은 ‘할아버지’처럼 보여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동안의 삶이 슬프게 지나갔다. 그러나 나이 든 아버지의 사진을 오래 들여다보며, 아버지에 대한 불만까지 포함한 지난날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마음이 돌아서 오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사람들은 꽃이 피면 사진을 찍고 꽃 구경을 간다. 겨울에는 나무나 풀 사진을 찍지도, 구경하러 가지도 않는다. 겨울나무는 사랑받을 자격도 없고, 죽은 것처럼 보인다.
추위를 많이 타던 나는 겨울이 싫었다. 겨울이 오면 몸뿐 아니라 마음과 생각까지 얼어붙는 듯했다. 겨울은 끝날 것 같지 않았고, 봄이 오기만 간절히 바랐다. 그 시절의 겨울에는 따뜻함도, 사랑도 없었다. 그래서 더 오랫동안 추웠다.
지금의 내 삶은 겨울이다. 인생에서의 겨울은 절망적이었다. 겨울에는 사람들과, 내가 좋아하던 모든 일들을 떠나보내야 했다. 후회와 상실만 남았다. 겉모습은 누추했고, 어느 곳에도 사랑을 줄 수도, 받을 수도 없었다. 삶에서의 봄을 기대할 수도 없을 만큼 지난 겨울은 길었다.
지친 끝에 놓아 주고, 겨울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빈자리는 내가 스스로 사랑하고 모든 것을 품을 줄 아는 무언가로 채워져 있었다. 겨울나무가 내년에 필 씨앗과 새잎을 안에 더 많이 품듯, 상처를 지닌 채로도 다음 해에 더 크게 자라듯. 겨울은 성숙해진 사랑이었다. 후회와 미움조차 포용하게 하고, 잃은 것도 없었다. 나는 그 겨울을 견디며 ‘겨울의 사랑’을 배웠다.
예전에 찍었던 증명사진들을 꺼내 보았다. 당시에는 못 나왔다고 생각했던 사진인데, 지금 보니 잘 나왔다. 하지만 너무 옛날 모습이고 흰옷을 입고 있어 여권 사진 규정에 맞지 않았다.
결국 화장을 더 하고, 조금 비싼 곳에서 다시 사진을 찍어 운전면허증을 갱신했다. 한 해가 가기 전에 미뤄 왔던 일을 하나 마쳤다.
한 해의 끝, 다시 나를 단장했다.
이번엔 조금 편안한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