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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빈 Mar 08. 2024

4호. Young Hearts Run Free

영국, 11월의 불꽃놀이

    11월 5일, Bonfire Night.

최근 친해진 언니의 제안으로 불꽃놀이에 갔다. 그냥 동네 공원에서 하는 작은 행사인 줄 알았던 나는 도착하고 나서야 꽤나 큰 축제라는 걸 깨달았다. 공원은 생각보다 훨씬 컸고, 축축한 공기를 뚫고 모여든 사람으로 가득 차있었다. 그제야 언니에게 물었다.

    "그런데 불꽃 축제를 갑자기 왜 하는 거야?"

    "옛날에 어떤 남자가 영국 의회를 폭파시키려고 했는데, 그게 실패로 돌아간 걸 기념하는 거야."

의회? 폭파? 예상치도 못했던 이유에 잠시 어안이 벙벙했지만 정신없는 소음에 대영제국이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했다는 사실은 기억 속에서 빠르게 잊혔다.


    초겨울 영국에는 오후 5시면 깜깜한 어둠이 드리운다. 게다가 비는 어찌나 자주 오는지. 마침 행사가 시작하기 전까지 비가 내렸던 탓에 축축한 잔디에서 한기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궂은 날씨와 추위를 묻어버리려는 건지 공원은 세상 모든 빛을 끌어온 듯한 모습이었다. 눈이 멀 것 같은 전구를 줄지어 달아 놓은 각종 게임부터 새하얀 눈이 펑 터져 나오는 꼬마 롤러코스터, 사람들을 태우고 사방으로 날려버리는 놀이기구까지. 모두를 위한 놀이가 준비되어 있었다. 붐비는 사람들의 행렬에 밀려다니던 와중 한 곳에 우리의 시선이 쏠렸다.

 

    그곳에 있었던 건 아주 작은 비행기. 화려한 기둥에 비행기가 여러 대 달린 모양의 유아용 놀이기구였다. 잠깐 정차한 놀이기구를 향해 아이들이 설레는 얼굴로 달려들었다. 꼬마들은 원을 이루고 있는 휘황찬란한 비행기들에 차례대로 올라탔다. 그 가운데 홀로 어두운 색을 하고 있는 무언가. 그 검은색 배트맨 비행기에도 한 아이가 올라있었다. 주황색 외투를 껴입고 검은색 안경을 낀 아이는 성인 남성 손만 한 핸들을 요리조리 돌려보았다. 세상에 눈앞에 놓인 핸들과 자신, 둘만 존재하는 듯 푹 빠진 아이는 자기도 모르는 새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그의 작은 얼굴을 채운 미소를 따라 내 입꼬리도 올라갔다. 어쩌면 그 꼬마에게는 인생 첫 비행기였을지 모르는 검은 배트맨 비행기. 그는 5분이라는 짧은 시간에 몇 천 원이면 세상을 다 가진 듯 웃을 수 있었다. 그의 순수함에 나는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나도 언젠가 저렇게 웃었을까?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당신은 인파로 빽빽하게 찬 잔디밭 어딘가에 서 있다. 바라던 자리는 아니지만 푸드트럭에서 핫도그를 먹다가 늦는 바람에 아무 데나 설 수밖에 없었다. 시작을 알리는 조그마한 빛이 붉게 터진다. 한편에서는 가수가 노래를 부른다. 그녀의 표정과 리듬 타는 몸짓만 봐도 아무도 이 노래를 그녀보다 신나게 부를 수 없을 것 같다. 그녀가 부르는 노래는 'Young Hearts Run Free'. 옆에 있는 어느 여자가 아버지와 마주 보고 노래에 맞춰 춤을 춘다.


    곧게 솟은 불이 축축한 초겨울 공기를 뚫고 뻗어나간다. 이들은 금빛 가루를 꼬리에 달고 있다. 마치 깊고 어두운 호수에서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유유히 검은 바탕을 물결쳐 갔던 그들은 어느 지점에 이르자 고개를 떨군다. 그러자 힘차게 바람을 가르던 몸통은 스르르 흩어져버리고 꼬리만 남아 금빛 가루를 뿌린다. 작디작은 별들처럼 반짝이다 희미하게 사라진다. 그 모습이 마치 어릴 적 봤던 만화 영화 신데렐라 속 요정이 뿌리는 마법 가루 같다. 어디선가 비비디 바비디 부를 흥얼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연이어 폭죽이 터진다. 소행성의 잔재가 지구에 떨어지듯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불꽃, 빨간 점을 찍어내며 사라지는 불꽃, 짧고 산발적으로 터지는 불꽃... 모두 사람들의 환호성을 자아냈다가 금세 사라진다. 대망의 마지막 불꽃이 하늘을 향해 올라간다. 하나, 둘, 셋,... 몇 인지도 모를 불꽃을 연달아 쏘아 올린다. 하늘 끝까지 올라간 그들은 거대한 원으로 퍼져 나가며 빛을 뿜어댄다. 크기가 클수록 밝고 오래 보이는 유성체처럼 그들은 잠시 하늘에 머문다. 그리고는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는 듯 터져 나온 빛줄기들이 땅으로 쏟아져내린다. 빛으로 비가 내리는 것처럼.


    빛이 모두 사라지고 다시 검게 칠해진 하늘. 땅으로 고개를 내리니 웃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당신은 생각한다. 높이 솟아오르는 불꽃 앞에 우리는 모두 똑같이 순수해진다고. 우수에 젖은 감상도 잠시, 먹먹해진 귀에 친구들에게 소리 지르며 당신은 왔던 길 그대로 공원을 빠져나온다. 아까 들었던 노래가 귓가에 맴돈다. Young hearts run free. 어린 마음은 자유롭게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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