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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어PD Apr 28. 2023

1993년, 세상일도 사람맘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 1993년, 고등학교 2학년

곧 고3이 된다는 두려움이 깔려 있었지만, 마음만 급했지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매일 점심시간에 친구들과 농구를 하고 저녁을 먹고 야자시간 직전까지 농구를 했다.    

땀을 뻘뻘 흘리고 들어와서는 쇄골이 다 보이게 젖은 교복을 반쯤 벗어 젖히고는 흔들어 말렸다.   

공부가 될 리 없었다.   

친구들과 어두워진 교실에서 수다를 떨다가, 책을 보는 둥 마는 둥 하고는 9시가 넘으면 집에 가는 생활이 반복됐다. 그나마 나는 모범생에 가까운 편이라 수학문제를 물어오는 친구들 덕에 책을 조금이라도 보게 됐다. 지금도 그렇지만, 남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많은 지식이 필요치 않다. 그저 상대방보다 하나라도 아는 게 있다면 누구나 가르칠 수 있다.


나는 문과였지만, 특이하게도 수학을 좋아했다. 인생에서는 딱 떨어지는 정답이 있을 수 없는데, 수학만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알지 못할 뿐이지 해석의 여지없이 정확한 길과 답이 있어서 좋았다.   

그렇다고 아주 잘한 건 아니고 고등학교에 입학한 직후, 수학을 잘하는 아이로 굳혀졌었다.   

첫 중간고사에서 수학을 한 개만 틀렸는데, 돌이켜보면 그때 선생님들과 친구들에게 그렇게 인식된 거 같다. 물론 그 후로 그저 그렇긴 했는데 첫 이미지가 졸업할 때까지 남아 있다는 게 신기했고 이후 내가 사회생활을 할 때 큰 영향을 줬다. 어떤 조직에 들어가거나 인간관계를 맺을 때, 첫 이미지가 중요하다는 걸 몸으로 느낀 계기가 됐다.


그날도 어둑해진 교실에서 땀에 젖은 교복을 흔들며 수학 ‘정석’을 펼쳐 놓고 열을 식히고 있었다. 정석 책은 두께감이 있어서 그런지 책을 펼쳐놨을 때의 느낌이 좋았다. 친구가 교실로 들어와서는 뜬금없이, 곧 학생회장 선거를 하니 나도 나가보라고 했다. 첨에는 ‘내가 무슨 그런 걸 하나’라는 생각에 웃어넘겼다. 그 친구도 그리 심각하게 한 얘기가 아니라 지나가는 말로 흘렸었다. 그리고 다음날, 친하게 지냈던 문학 선생님과 담임도 나에게 해보라 했다.


결국 선거에 나가게 됐다.   

사실 학생회장이 되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그 당시 좋아하던 여학생의 눈에 띄고 싶었던 게 더 컸던 거 같다.


유세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진 않았다. 가난한 집 아이들은 철이 빨리 든다고 했던가? 시작도 하기 전에, 당선되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집안 형편과 가족들이 드러나는 것도 싫었다. 막연히 회장이 되면 부모의 후원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다못해 소풍 가는 날 선생들 점심이라도 지원을 해줘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적극적으로 유세를 하진 않았는데, 그럼에도 마음속에는 못할 것도 없다는 반발심도 생겼다. 그러던 중에 전체 반을 돌면서 정견발표를 해야 한다고 해, 1학년 교실을 돌며, 내가 왜 학생회장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당시 우리 학교는 남녀공학이었다. 1학년 후배들 반에 들어갈 때, 여자 후배들의 환호성과 박수 소리가 기억이 난다. 후배들 입장에서도 재밌는 볼거리였을 것 같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다. 어렴풋이 학생과 선생님들의 소통을 강화하고 서로를 이해하는 시간과 자리를 많이 만들겠다고 했던 것 같다. 막연하지만 선거의 메인 콘셉트를 그리 잡고 있었다. 아무튼 조용하고 키 큰 선배 남학생에 대한 여자 후배들의 반응에 살짝 고무 됐던 게 사실이다. 이러다 덜컥 당선이 되면 어쩌지…


회장 선거에는 총 3명이 출마했다. 한 명은 옆반이었는데 공부를 잘하는 친구 H였다. 항상 웃는 얼굴이었고 그다지 친하진 않았지만, 그 친구가 인상 쓰고 싸운 걸 본 기억이 없다. 붙임성이 좋아서 선생님과 선배들에게 애교도 부리고 교무실에도 스스럼없이 가는 친구였다. (보통 교무실은 혼날 때나 가던 곳 아니던가…) H는 자기주장이 강하지 않아서 인지, 딱히 적이 없는 타입이었다.


다른 한 명은 1학년때 같은 반이었던 S였다. 같이 농구도 하고 집에도 놀러 가고 이야기도 꽤 많이 나눴던 친구였다. 어머니가 없었던 나는 그 친구집에 놀러 갈 때마다 부러웠다. 엄마와 티격태격하기도 하고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주제 삼아 수다를 떨기도 하고 갈 때마다 맛있는 밥을 차려주셨던 기억이 있다. 하루는 놀러 갈 때 장미꽃을 친구 엄마한테 선물로 드렸던 적이 있다. 아마 친구 어머님도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을 텐데, 지금 생각하니 좋은 접근이었던 것 같다. 뭔가 보답하고 싶었는데, 돈이 없었으니 고민 끝에 한송이에 천 원 하는 장미꽃을 샀던 게 아닐까… 아무튼 크게 모자라지 않고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자란 그 친구는 공부를 뛰어나게 잘하진 못했지만, 잡지와 책을 많이 읽고 시사 상식에 관심이 많아서 내가 몰랐던 세상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줬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3명의 후보가 경쟁을 했다. 1학년 후배들의 지지를 많이 받았던 나. 친구들 사이에 인기가 많고 엄마찬스가 있던 S. 선배들과 선생님들이 이뻐했던 H. 이렇게 지지 기반이 갈렸다.


선거라는 것이 참 그렇다. 후보 당사자는 정확한 예측이 어렵다. 주변에는 나를 지지하는 사람만 있기 때문에, 판을 냉정하게 보기 힘들다. 선거활동도 하지 않던 나는 사실 쉽게 될 줄 알았다. 오히려 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더 컸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뭐 대단한 감투라고 그렇게 미리 졸아 있었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결과는 당연히 안 됐다. 3명 중 3위였다. 그나마 나를 찍어준 1학년 후배들 덕분에 2위와 표차이가 얼마 나지 않았다. 후련했지만, 아쉬움도 남았다. 세상이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느낀 계기가 됐다. 혹시 전력을 다했다면 됐을까? 역사에 ‘혹시’라는 가정을 하는 게 세상 쓸데없는 일이긴 하지만, 30년이 지난 지금 그런 생각을 해본다.    

확실한 건 스스로 확신도 없고 애쓰지 않는데 저절로 되는 일은 없다는 거다. 세상에는 혼신의 힘을 다 쏟아도 안 되는 일이 수두룩하다. 그리고 최선을 다했는지는 본인이 제일 잘 안다.


학생회장 선거에 꼴찌를 하고 며칠 후. 당선된 H는 학생회를 꾸렸다. 학생회에는 조직이 여러 개 있었다. 기억나는 건 선도부와 총무부, 체육부 이런 게 있었던 것 같다.   

하루는 당선된 H와 함께 부회장이 된 여학생이 찾아왔다. 엄청 모범생에 공부를 잘했던 그 여학생과는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학생회를 꾸리고 있는데, 총무부장을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처음엔 거절했다. 선거에서 떨어진 것도 창피했는데 자존심도 없이 그런 활동을 한다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그런데 그 부회장도 끈질겼다. 두세 번 찾아와서 다시 생각해 보라고 했다. 학생과 선생님 사이의 소통을 늘린다는 공약이 자기는 좋았다고 같이 실현해보지 않겠냐고 설득하는데, 마지막엔 뭐라 반박할 명분도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좋아했다던 여학생이 학생회로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못 이기는 척 참여했다.


학생회 활동은 나름 재미있었다.  

소풍과 체육대회, 학교축제 등을 기획하고 준비했다. MBTI, I 성향인 내가 그 당시에는 전교 행사에 사회를 본 적도 있다.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즐기진 않지만 그렇게 싫어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때는 그렇게 많은 사람 앞에 나서는 게 떨리지 않았다.  

서른 후반쯤에 회사에서 회의를 하거나 여러 사람 앞에서 발표를 할 때마다 심장이 너무 뛰고 호흡이 가빠져서 한의원에 가본 적이 있었다. 어릴 때는 그러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그즈음부터 그런 증상이 나타난다고 하니, 스트레스가 많고 나이가 들면 심장 기능이 약해져서 그럴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는 결국 그 비싼 한약을 지어온 적이 있다. (한약을 먹고는 별 차도가 없었지만 부장이 바뀌고 그 증상은 사라졌다)


학생회를 하면서 나는 사회성을 더 키울 수 있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협업이라는 걸 경험해 보고 의견 차이가 생길 때 토론하고 조율하는 방법을 배웠다.  

사람마음이 다 내 맘 같지 않다는 것도 그때 처음 느끼게 됐다.  

2학년 가을쯤이던가, 체육대회 준비를 하느라 쉬는 시간마다 뛰어다니고 저녁이 되면 모여서 회의를 하고 바쁠 때였다.  

복도 계단을 뛰어 올라가고 있었는데 같은 반 친구를 마주쳤다. 같이 농구를 하고 친구들끼리 모여서 논적은 많지만 단둘이 대화를 나눈 적은 없던 친구였다. 그 친구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날 들었던 말이 지금도 생생히 기억에 남아 있다.  

‘야 나대지 마라’  

너무 훅 들어온 그 말은 싸우자는 말이었을까? 내가 왜 나대는 것처럼 보였을까?  

생각해 보면 그런 표현은 나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었지만 그때는 문제 삼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와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았고 그런 일로 싸워봐야, 한 대 때리면 한 대 맞는 게 싸움 아닌가… 소모적이고 불필요한 일이 싸움이라고 생각했다. 당시에도 어지간한 일에는 분노하지 않는 성격이기도 하다.  

하지만 기분이 팍 상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내가 하는 일이 누군가에겐 불편하게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하게 됐다. 나중에 다른 친구에게 이때 일을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 원래 그런 친구니 신경 쓰지 말라고 말에 위안이 됐다. 원래 그런 건 내가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내 잘못이 아니었다.  


고등학생 때의 경험이 그 후 사회생활을 하는데 많은 영향을 줬다.  

어딜 가나 첫인상이 중요하다는 점과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한다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대충 하고 결과를 기다려본들 좋은 결과를 얻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래서 무얼 하려고 결정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하기로 결정한 일은 어떻게든 마무리를 지으려는 사람이 됐다.   

또 가장 큰 깨달음은 사람의 마음은 내가 어쩔 수 없다는 거다.   

아침에 해가 뜨고 밤에 달이 뜨듯이 파도가 밀려오고 쓸려 나가듯, 타인의 마음은 온전히 타인의 것이다.   

그걸 바꾸기 위해 애쓰는 게 가장 어리석은 일이다.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 된다.   

살면서 나에게 살기를 띠며 적대적으로 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운전하다 끼어들기로 실랑이가 벌어진 상대방이나 술에 취해 정신을 가누지 못하는 사람, 업무 하는 게 자기 성에 차지 않아 매일 화를 내던 부장 정도가 내가 죽도록 미웠을지 모르겠다.  

그런 사람들의 마음 역시, 내가 어쩌지 못한다. 그런 사람들에게까지 좋은 사람으로 남아야 할 필요도 굳이 없다.  


100%는 아니었지만 고교시절을 지나며 그런 것들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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