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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어PD Apr 07. 2023

1995년, 나의 첫 대학생활은 비둘기호에서 시작됐다

1995년 3월

1995년, 지금은 없어진 경춘선 비둘기호.


기차요금이 2천 원이 안 됐던 기억이 난다. 요즘 지하철처럼 양옆으로 길쭉한 의자가 있었고 지정석이 아니고 선착순으로 앉는 방식이었다. 소음이 심했고 퀴퀴한 냄새도 났었다. 기차 한 칸과 한 칸 사이 연결 부분에서 흡연자들이 담배를 피우곤 했는데, 담배 인심이 후했던 시절이라 담배가 떨어진 날에는 ‘담배 한 대만’이라고 웃으며 말을 건네면 처음 보는 사람과도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때였다.  청량리역에서 출발해, 성북역을 지나 대성리, 청평, 가평, 강촌을 지나 남춘천역과 춘천역을 오가는 기차였다.


그해 2월 말쯤 새로 입학한 대학교 기숙사에 가기 위해 아주 이른 시간에 비둘기호를 탔다. 어깨에는 빨간 이불 보따리를 멘 채로 한 손엔 이것저것 담은 가방을 들고 있었다.


40이 넘은 지금도 혼자 슈퍼에 가서 호박 하나, 두부 하나를 사도 아무렇지 않지만 그때는 그런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더 없었다. 이제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남자애가 빨간 이불 보따리를 들고 기차에 타는 것이 부끄러울 만도 했지만 말이다.


고등학교 시절 부끄러움을 느꼈던 적이 몇 번 있긴 있다. 첫사랑이었던 고등학교 같은 반 여자아이와 길거리를 걷던 중, 길거리 상점 모자에 시선을 주고 있는 걸 발견하고는 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호기롭게 모자를 사주겠다고 했고 그 애가 마음에 들어 하던 모자를 꺼내달라고 했다. 그리고 계산을 하려고 하는데, 내가 갖고 있던 돈이 모자값에 모자랐다. 오천 원도 안 하던 모자였을 거다.


그 시절 나는, 아니 우리 집은 누군가에게 모자를 사줄 형편이 아니었다.   

그때 느낀 부끄러움이 가끔 꿈속에 나오기도 했다. 그 후로 내가 돈을 벌기 전까지, 누군가에게 무엇을 사주겠다고 한 적이 별로 없었고 받지도 않았다.   

그 당시 내가 부끄럽다고 느낀 건 가난한 나의 현실이었을까? 아니면 돈도 없으면서 무엇을 사주겠다고 대책 없는 호기를 부린 마음이었을까?


가난한 집에서 자란 사람은  크게 두 가지 캐릭터 중 하나가 되기 쉽다.


첫 번째 경우는 가난을 부끄러워하고 위축되고 소심해지고 결국엔 가난을 혐오하게 된다. 그리고는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를 쓴다. 증오심은 공부를 하거나 일을 하게 하는 동력이 되고 운이 조금만 따른다면 상당한 비율로 가난에서 벗어나기도 한다.


두 번째 경우는 가난이 익숙해진다. 가난한 나의 상황들을 당연히 생각하고 당당해진다. 그리고는 스스로 가난하지 않다고 자기 최면을 걸어버린다. 지금 우리 부모님 세대 중에 이런 분들이 많은 것 같다. 객관적인 지표들이 그들을 가난 뱅이라고 가리키고 있지만, 너무나도 당당하고 위축되지 않는다. 물론 가난하다고 당당하지 못할 건 없지만, 가난하다는 것조차도 인정하지 않는 것 같다. 이런 경우에는 가난을 인지하지 못해서 극복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현실을 유지하면서 살게 된다.


나는 가난이 너무 싫었던 전자의 경우였다.


고등학교 시절, 나의 꿈은 정치부 기자가 되는 것이었다. 내가 가난한 것이 정치, 사회, 시스템에 의한 것만 같았다. 가진 사람들에 대한 선망과 증오가 공존했다. 경찰이 범죄자들을 잡는다면 기자는 가진 자들을 응징하는 직업이란 생각을 그때는 했었고 멋있어 보였다. 하지만 그건 대외적으로, 있어 보이고 싶어서 만든 허상의 꿈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만 가득했다.


어떻게 해야 가난하지 않게 살 수 있을까? (질문이 참 소박하다,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될 수 있을까가 아닌, 가난하지 않을까라니…)   

고민의 결론을 찾기도 전에 고등학교를 졸업할 나이가 되었고, 다른 친구들처럼 대학에 가게 되었다. 그 당시 내 성적에 맞으면서 등록금이 저렴한 국립대를 알아보다 춘천에 있는 대학에 원서를 냈고 붙었다. 입학금과 등록금을 포함해 처음 냈던 돈이 90만 원이었다. 기숙사는 한 학기에 30~40만 원 정도였다. 주말에도 아침, 점심, 저녁이 모두 나왔다. 가성비가 좋아서 신입생들 사이에서 기숙사는 인기가 높았다.


아무튼 대학에 붙고 겨울에 과사무실에 방문해, 내가 기숙사에 꼭 가야 하는 이유를 사정하자, 혼자 와서 사정하는 내가 안 돼 보였는지, 내 이야기를 들은 그분(조교였던 것 같다)이 기숙사에 아는 사람을 통해 넣어주셨다. 나중에 알게 된 거지만, 1학년들은 성적순으로 기숙사에 신청해서 들어갈 수 있었는데, 내 성적이면 사정하지 않아도 들어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중학교에 올라가면서부터는 대부분의 큰 일들을 혼자 결정하고 진행했다.   

부모님은 이혼하셔서 어머니는 안 계셨고 아버지는 막일로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처지였다.   

인생에 대한 깊이 있는 대화나 진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건 사치였다.   

중졸이었던 아버지는 중학교 이후의 시스템을 본인이 겪어보지 못해서 특별히 간섭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를 믿어서라기보다는, 당신이 모르는 분야를 들키고 싶지 않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고등학교를 갔고 내 의지대로 문과를 선택했다. 그리고 대학교 진학과 취직, 결혼 그리고 집을 사고파는 모든 일에 아버지는 관여한 적이 없다.    

20년도 넘은 기억이라 정확하진 않지만, 중고등학교 입학식과 졸업식 그리고 대학 입학식과 졸업식에 가족 누군가가 왔던 기억이 없다. 대학에 다니는 4년 내내, 닭갈비 먹으러라도 한번 와볼 법했는데 말이다.


비둘기호로 서울에서 춘천까지는 2시간이 넘게 걸렸다.

당시 경춘선은 외선이었다.   

하나의 철로에 왕복 열차가 오갔어야 해서 역마다 마주 오는 기차를 기다렸다 가기 일쑤였다. 그래서 연착도 많았는데, 어떨 때는 기다리던 열차에서 내려 우동을 사 먹었던 기억도 있다. 플랫폼에서 먹는 우동은 어찌나 맛있던지, 언제 올지 모르는 기차를 기다리며 뜨거운 우동 한 그릇에 담배 한 대… 가슴 설레는 조합이다.


그렇게도 설레는 대학생활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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