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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어PD May 04. 2023

1999년, 제대로 된 직장은 처음이라

- 1999년 6월 -

대학을 졸업하고 제대로 된 회사를 들어간 건 6개월이 지난 후였다. 작은 IT 중소기업이었다.  

당시 한글과 컴퓨터의 자회사 성격인 ‘이찬진컴퓨터교실’이라는 회사에 교육용 CD롬 타이틀을 만들어 납품하는 회사였다. 이찬진컴퓨터교실에서 콘텐츠 제작 부서가 분사해 나온 외주사였던 셈이었다.


그때는 취업이 너무 힘들었던 시기였다. IMF 직후였어서 경제가 말이 아니었다.   

졸업과 동시에 여러 군데 이력서를 냈지만 취업이 되지 않았다. 출판사라고 해서 가보면 책 방문 판매를 시키는 곳이었고 이벤트 회사라는 곳에서는 홍삼을 팔기도 했다. 또 전화영업을 하는 곳에서 사람을 많이 뽑았던 것 같다. 10만 원~30만 원 정도의 기본급에 영업한 만큼 성과급을 주는 구조라 회사에서도 손해 볼 게 없어서 그런지 취업시장이 온통 그런 곳이었던 기억이다. 그런곳에도 서울에 있는 대학을 나온 친구들이 수두룩했다. 어려운 시기였던 건 분명했다.


여러 곳에서 알바를 하다가 첫 직장으로 정착한 곳이 앞에서 말한 CD롬 타이틀 제작하는 회사였다.   

이력서를 넣고 면접을 보자는 연락이 왔다. 실무자 면접과 사장 면접을 거쳐 출근을 해도 좋다는 통보를 받았다. 처음으로 제대로 된 회사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3개월은 수습기간이었고 첫 달 월급으로 58만 원을 받았다. 그 후 첫 계약 연봉은 1,125만 원이었다. 첫 연봉이라 20년이 지난 지금도 정확히 기억이 난다.   

취직이 너무 안돼서 기술을 가르쳐 주는 곳이 있다면 돈 안 받고도 가겠다는 열정이 있던 시기라 그 돈도 꽤 크게 느껴졌었다. 원래 주어진 상황에 감사하고 별 불만 없이 최선을 다하는 것이 ISTJ 유형의 인간 아니었던가…


출근을 하고 내가 맡은 일은 스토리보드를 쓰는 일이었다. 유아들이 컴퓨터를 익힐 때 가이드가 되는 교육용 콘텐츠였는데, 커리큘럼이 나오면 그에 맞는 스토리보드를 쓰고 개발자가 코딩을 하면 잘 구현이 됐는지 확인하고 검수하는 일이었다. 일은 꽤 재미있었다. 당시 개발자였던 남자 대리 한 분이 있었는데, 근무시간에 스타크래프트를 하기도 하고 슬리퍼를 신고 다녔던 기억이 있다. 중간중간 나가서 담배를 폈는데, 멋져 보였다. 저 정도의 근무태도로 회사를 다닌다는 건 정말 개차반이거나, 실력이 출중하거나 둘 중 하나였을 것 같은데…   

그분은 후자였었던것 같다.


하루는 그 대리가 점심식사 후 나에게 새 하드디스크와 램을 하나씩 주면서 직원들 컴퓨터를 전체적으로 업그레이드해야 해서 개인 PC의 부품을 나눠 줄 테니 각자 부품을 교체하고 운영체제를 설치하라고 했다.   

난감했다. 국문학과를 졸업한 나는 한컴워드를 갓 200타 넘기는 수준의 컴맹이었다. 그런 나에게 컴퓨터 부품을 알아서 교체하라니… 이건 나를 테스트해 보려는 건가 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 못할 것 같은 일을 던져주고 어떻게 나오는지 시험해 보려고 하는 건가… 그래도 어릴 때부터 과학상자와 프라모델들을 즐겨 조립해 와서 기계와 친숙했다. 해보자는 생각으로, 일단 PC를 열었다. 메인보드에 붙어있는 각종 부품들을 그대로 종이에 그려 넣고 조심조심 떼어서 하드디스크와 램을 붙였다.  대리가 적어준 윈도우 까는 방법대로 시디를 넣고 설치를 하려는데 되지 않았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시간이 점점 지나 퇴근시간을 넘겼다. 약간의 자존심도 생겨서 도움 없이 혼자 해보고 싶었다. 당시에는 스마트폰이 없던 시기라 유튜브나 인터넷으로 방법을 참고할 수도 없었고 그런 검색 방법에 익숙지 않았다. 결국 밤늦은 시간, 대리에게 전화를 하고는 새로운 하드디스크에는 점퍼를 설정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저녁 12시. 한글과 포토샵 등 필수 프로그램들을 설치하고 퇴근했다. 오후시간을 모두 투자하고, 야근까지 하면서 단기간에 PC의 구조와 조립방법 등을 터득했다. 지나고 보니 그 시간이 아주 중요했던 것 같다. 업무 자체가 유아에게 컴퓨터를 가르치는 콘텐츠다 보니 컴퓨터의 원리를 알고 부품 하나하나의 역할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콘텐츠를 기획하고 만든다는 게 얼마나 공허한 일인가. 상사가 하나하나 차근히 설명해 주면서 가르쳐줬을 수도 있겠지만, 이런 방법으로 나를 단련시켜 준 것도 지나고 보니 나쁘지 않은 방법인 것 같다.   

지금도 그때, 사무실 책상 밑에 기어 들어가 생애 처음으로 PC 본체를 뜯었을 때의 기억이 이렇게 생생하니 말이다.


나는 기계를 좋아한다. 수학을 좋아했던 논리처럼, 기계는 거짓말이 없다. 정답과 오답이 명확하고 중간이 없다. 되거나 안되거나, 0이거나 1이거나, 좋거나 싫거나, 내편이거나 적이거나… 하지만 살아가면서 나는 내 마음도 명확하게 모를 때가 많고, 어떤 일을 결정할 때 답을 모를 때가 너무 많다. 사람을 만날 때도 좋았다가 싫어지기도 하고 싫다가 좋아지기도 한다. 아무튼 기본적으로 기계를 좋아하는 성향이었는데, 가난한 집안 환경으로 기계나 컴퓨터를 어릴 때부터 다룰 수가 없었다. 첫 직장을 다니면서 내가 기계를 좋아하고 컴퓨터로 무언가를 하는 게 편하고 잘한다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됐다.


그 후로 나는 포토샵에 흠뻑 빠졌다. 포토샵으로는 안 되는 것이 없었다. 상상력이 부족할 뿐, 생각한 모든 것이 구현되는 게 신기했다. 포토샵이 익숙해지면서 사진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고 특히 당시 유행이 시작된 디지털카메라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리고는 용산에서 ‘용팔이’에 바가지를 써서, 90만 원이면 살 ‘니콘 995’ 모델을 120여 만원에 구입했다. 당시 한 달 월급이 90여만 원이었고, 그중 50만 원은 주택청약통장에 넣고 나머지로 차비며 밥값, 담배에 연애까지 했던 나에게 120만 원이라는 돈은 엄청 큰돈이었다. 당연히 할부로 지르고 그 카메라를 항상 지니고 다녔다. 출퇴근하면서 길거리에서, 버스에서, 전철에서 셔터를 눌렀고, 잠들기 전 방안에서도 사진을 찍었다. 내 기억에 니콘 995의 가장 큰 장점은 접사였는데, 꽃사진등을 당시에 많이 찍었었다. 그러면서 노출과 셔터스피드, ISO 등에 대해 이해하게 됐다. 자연스럽게 사진 찍는 일이 일상이 되었고 그 사진을 포토샵으로 보정하고 다듬는 것이 취미가 되었다. 포토샵을 잘 다룰 수 있게 된 것은 내 인생에서 큰 전환점이 된 것 같다. 업무적으로도 큰 도움이 되었고, 지금 하고 있는 영상 일을 하게 된 계기가 됐다.

어느 날인가 그 대리님이 회사에서 뭔가를 하고 있었는데, 동영상을 편집 중이었다.  

사진에만 효과를 주는 게 가능한 줄 알았던 내게는 큰 충격이었다. 포토샵과 같은 식의 효과를 움직이는 영상에도 적용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신기했다. 대리가 쓰고 있던 프로그램은 프리미어였다. 급하게 설치 파일을 받아서 컴퓨터에 설치했다. 그리고는 이것저것 막 눌러봤었다. 프리미어 책을 여러 권 사서 보면서 하나하나 따라 해봤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영상제작의 기본도 없이 단순하게 프로그램에 빠진 내가 안쓰럽고 기특하다.  

아마 고등학교 때 이런 영상 제작에 관한 걸 접했다면 대학도 그런 분야로 진학하고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영상은 기획이 8할이다. 촬영과 편집은 농구할 때 왼손 같은 역할일 뿐, 그저 거들뿐인데. 난 그 촬영과 편집에만 꽂혀서 혼자 찍고 붙이고를 반복했다. 그러면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접하고 설치해 보고 다루게 됐다. 이것저것 해보다가 3D 맥스도 깔아서 모델링도 해봤으니… 학원 한번 다니지 않고 그걸 어찌 다 해 본 건지… 열정이 대단했던 것 같다. 하지만 기획력이 부족해서였는지 실력이 늘진 않았던 것 같다.


회사에서의 주 보직은 기획이었다. 포토샵과 프리미어는 나중에 전업의 큰 계기가 됐지만 당시에는 취미에 불과했다. 콘텐츠를 기획하고 세부 스토리보드를 쓰고 개발자가 만든 프로그램을 검수하는 게 주 업무였다. 스토리보드를 쓰면서 글쓰기 훈련이 자연스럽게 됐다. 그때 업무 중 어렴풋이 기억나는 건 유아들이 좋아할 만한 캐릭터를 만들었는데, 마우스 모양의 캐릭터 이름이 따닥이였고 담그리라는 캐릭터도 있었던 것 같다.  

그 캐릭터들이 PC를 가르쳐주는 형식이어서, 캐릭터들의 대사를 원고 형태로 쓰는 일을 반복했다.   

그리고 CD롬 타이틀 프로토타입을 완성해서 납품하는 날이면 전날밤에 꼭 밤을 새웠다. 그때는 젊을 때여서 그랬는지 밤새 한숨도 안 자고 일했던 기억이 난다. 보고 또 보고 오타는 없는지 오류는 없는지 단추를 하나하나 다 눌러보고 각종 경우의 수에도 에러가 나지 않는지 찾는 게 일이었다. 끝이 없었다. 그저 마지막 시간이 될 때에 멈추는 거였다.


그렇게 회사에 입사한 지 2년째에 회사는 많이 성장했다.   

내가 들어갔을 때만 해도 전 직원이 5~6명이었는데, 15명까지 늘었다.   

CD롬 타이틀 만드는 이외에 다른 사업도 진행했었는데, 신통치는 않았다. 당시에 직원들 사이에 두 가지 의견이 크게 갈렸었다. 회사의 주력 사업인 CD롬 타이틀 제작에 더 집중해야 한다는 의견과 다른 영역으로의 사업 확장이 필요하다는 의견이었다. 사장은 확장을 원했지만 창립멤버 직원들은 대다수가 반대했었다.   

나는 확장에 찬성하는 쪽이었지만 평사원인 상태에서 내 의견은 중요하지 않았다. 대신 사장은 어떤 사업을 하면 좋을지 시장 조사를 나에게 시킨 적이 있었다. 직장생활 2년 차가 뭘 알까 싶긴 하지만 나름 열심히 보고서를 썼다. 지금의 내가 그런 프로젝트를 맡는다면 그때와 얼마나 다른 보고서를 썼을까…   

어쨌든 그런 과정을 거치며 3년째에 회사는 많이 어려워졌다. 큰 흐름에서 CD롬 타이틀 사업은 사라지는 시장이었다. 물론 2000년대 중후반까지도 CD는 많이 사용됐지만 주 납품 회사도 사정이 어려워지자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자연스럽게 외주사부터 정리가 되고 일거리가 없어지자 나의 일자리도 자연스럽게 없어질 위기에 처해졌다.


회사가 어려워지면 직원들이 모를 수가 없다.   

월급이 며칠씩 밀리기 시작하고 회사에 가도 예전만큼 바쁘지 않으면서 체감하게 된다.   

직원들은 식사를 하거나 담배를 피울 때마다 본인들이 들은 이야기나 느낀 점을 나누고 그 얘기들은 또 확대 재생산된다. 두려움과 부정적 감정은 빨리 확산된다. 그리고 무기력해진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걸 알게 되면서 이직을 알아보게 된다. 그렇게 한 명, 두 명 이직하게 되면 그 조직은 순식간에 무너지게 된다.   

그래도 난 희망이 있었다. 이제 나도 신입이 아니었다. 3년의 경력이 쌓여서 이력서를 낼 때도 경력직으로 낼 수 있게 됐다. 3년간 내가 받은 연봉과도 바꿀 수 없는 더 큰 가치가 경력이었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는데 ‘잡코리아’에 정성껏 이력서를 등록했었다. 특히 자기소개서 형식을 소설처럼 썼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이곳저곳에 이력서를 내기도 하고 등재도 시켜놓고 크게 의미 없는 출퇴근을 하고 있을 때, 나의 두 번째 직장이 될 그곳에서 운명처럼 먼저 전화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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