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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어PD Feb 22. 2024

‘조국’의 등장으로 죽음을 생각해 보다

유명인, 혹은 나와 인연이 없는 이의 죽음에 눈물을 흘린 적이 있던가?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겨울방학을 맞아 집에 있을 때였다.  

1996년, 나는 컴퓨터가 없었다. 집에서 즐길 수 있는 건 책을 읽거나 라디오와 카세트, CD로 음악을 듣는 게 전부였다. (나는 TV를 즐겨보지 않았다)  

그날도 늦게까지 이승환의 노래를 듣다 잠들었다.   

그리고 정말 우연히 새벽에 눈을 떠 5시에 라디오를 켰다.   

거짓말처럼 그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다.   

1996년 1월 6일, 김광석의 죽음이다. 나와는 완벽한 타인이지만 그의 음악을 자주 들어서 기분이 이상했다. 그가 만든 음악에 공감해서인지, 나는 그를 ‘지인’으로 여기고 있었나 보다.


나와 직접적인 인연은 없지만 특정인의 죽음이 나에게 슬픔을 안겨주는 일은 계속 일어났다.  

  

기억나는 죽음을 떠올려보면  

축구선수였던 유상철은 췌장암으로 죽었다.  

개그우먼 박지선은 엄마와 함께 자살했다.  

영화감독 김기덕은 코로나로 사망했다.  

가수 설리와 샤이니의 종현은 우울증으로 자살을 선택했고  

구하라는 전 남자 친구와 안티들의 공격을 못 이기고 역시 자살했다.  

영화배우 조민기는 미투가 터지자 자살했고 김주혁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김성민 배우는 부인과 싸우다 화장실에서 목을 멨다.  

야구해설가 하일성은 사기를 당해 재산을 날리고 자살했다.  

신해철은 의료사고로 사망했다.  

최진실, 최진영, 조성민은 차례로 자살했다.  

야구선수였던 최동원은 대장암으로, 배우 장진영은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한 명 한 명 안타까운 죽음이다.   

병에 걸려서 죽고 사고로 죽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인간은 한 살에도 죽고 스무 살에도 죽고 늙어서도 죽는다.   

그렇게 죽음은 늘 우리 곁에 놓여 있다.


수많은 타인의 죽음이 스쳐 지나가지만 그중에 마음에 걸리는 죽음이 있다.  

김광석처럼 그의 활동에 공감했거나 감명받았던 사람의 죽음이 그런 경우인데, 노무현의 죽음이 그랬고 노회찬의 죽음이 그랬다.   

최근에는 배우 이선균의 죽음이 스쳐지나 가지지 않는다.  

노무현은 이명박이 죽였고 노회찬과 이선균은 대중과 언론이 죽였다. 모두 자살이지만 ‘자의’가 아닌 죽음이다.  

공통점은 또 있다, 한 사람을 궁지로 몰아넣고 죽을 때까지 돌을 던졌다. 이래도 안 죽을래? 이래도?  

죽지 않으면 괴롭힘의 강도는 더욱 강해지고 모욕과 조롱, 비아냥은 도를 넘어선다.  

한번 낙인이 찍히면 내편, 네 편을 구분하지 않는다.   

처음엔 누군가 의도를 갖고 저기를 보라며 가십거리를 던지는데 다행히 미친개들이 흥미를 느끼지 못하면 흐지부지되지만, 한두 마리씩 붙어서 잘근잘근 씹고 있으면 무슨 잔치라도 벌어진냥 모여든다.  

그렇게 여기저기서 한 마디씩 붙다 보면 결국엔 성대한 굿판이 벌어진다. 그가 쌓은 모든 생의 흔적들은 폭풍우에 쓸려 사라지고 남은 건 혐오와 증오뿐이다.  

어느 시점부터는 사실이 무엇인지 중요하지 않다. 미친개들의 놀잇감이 되어 버린다. 그러면서 개들은 상대적인 우월감까지 느낀다. 그리고 악마화된 ‘그’가 죽을 때까지 즐김은 계속된다.  

결국 그들의 ‘즐김’을 이겨내지 못하면 죽어야 한다.    


이선균은 그 즐김을 이겨내지 못했다.   

나는 그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 잘 모른다. 마약을 했을 수도 있고 바람을 피웠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사실이 나에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법을 어겼다면 재판을 받고 판결에 따라 벌을 받으면 된다. 내가 그에게 돌을 던질 어떤 명분도 대의도 동기도 없다. 남들이라고 나의 경우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도박을 하듯 증오의 바다에 배팅을 한다.    

선망의 대상이었던 스타가 범죄자가 되었을 때, 대중들이 느끼는 감정은 아쉬움일까 통쾌함일까?  

‘거봐라, 내가 그럴 줄 알았다’, ‘설마 그 사람이?’, ’ 영화나 드라마, TV에서 보여준 모습들은 다 위선이었어?‘  

혹시라도 그를 옹호하는 사람이 있다면 같은 무게로 싸잡아 비난한다.   

분노를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낸다.


최근 몇 년 사이 대한민국 전 국민이 한 목소리로 욕을 퍼붓고 저주를 쏟아냈던 사건이 ‘조국’ 사건이다.  

처음에는 사모펀드에 투자했다는 이유로 조사를 시작했고 파다 보니 사학 재단 비리를 파헤쳤다.  

그러다 조국의 자녀들이 입시비리를 저질렀다는 쪽으로 포커스를 맞춰서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동양대’를 일류대학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동양대 표창장 위조, 인턴 증명서 위조 등의 혐의로 조국 부인은 구속되고 딸은 의사면허가 취소됐다. 그리고 사모펀드니 사학비리니 이런 것들은 무죄가 나왔지만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다.  

이쯤 되면 억울해서라도 자살했을 것 같다. 모든 대한민국 사람들이 (정확히는 당시 검찰들) 원했던 것도 그의 죽음이지 않았을까 싶다. 왜 안 죽지? 이 정도로 모욕을 줬는데도 안 죽네? 희한하네?…  

가장 질긴 게 목숨이지만 또 솜털처럼 가벼운 것도 목숨이다. 총을 여러 발 맞고도 죽지 않는 사람이 있는 반면, 예능프로그램 촬영 중 떡을 먹다가 죽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세상에 죽어 마땅한 사람은 없다.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들도 ‘손쉽게’ 죽여서는 안 된다. 살아서 죗값을 치르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표창장 위조와 인턴 증명서 위조가 ‘사실’이라고 쳐도 그만한 일로 사람이 죽기를 바라는 건 너무 가혹하지 않나?…


그래서 ‘죽음’을 이겨낸 그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공권력을 이용해 한 가족, 한 가문을 짓밟고 죽음을 종용당했지만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은 그가 감사하다. 죽음으로 결백과 억울함을 표현하는 것은 가장 가볍고 편안한 방법이다.


노무현도 노회찬도 이선균도 그렇게 죽어선 안 됐다. 어떤 이유든 자살을 선택한 모든 이는 그렇게 죽으면 안 된다. 어떻게든 살아남아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노무현의 죽음이 박근혜의 당선을 막지도 못했고 노회찬의 죽음으로 정의당이 성장한 것도 아닌 것 같다.  

이선균의 죽음이야 말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개죽음 그 이상도 이하도 되지 못했다.


‘조국’이 죽음을 선택하지 않고 새로운 시작을 선택하면서 그 결과가 어떻게 만들어질지 궁금해진다.  

새롭게 얻은 인생이라 생각하고 많은 사람들의 삶을 나아지는데 그의 능력을 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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