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5년쯤 전에 회사에서 콘텐츠를 만들어서 올리면 시상을 하는 이벤트를 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개인적인 콘텐츠를 꽤 정성 들여 만들었다.
이 이벤트에서 나는 무려 2등을 했다. 부상으로 에어팟프로를 받았다. 삼성에서 에어팟프로를 주는 것이 파격적이긴 했지만 말랑말랑한 조직문화를 위해 담당자가 고심 끝에 에어팟프로를 상품으로 정했었다. 참고로 1등은 고프로 촬영 세트였다.
그렇게 해서 에어팟프로를 처음 써보게 됐는데, 노이즈캔슬링 기능이 압권이었다.
사람들이 붐비는 지하철역 안에서 노이즈캔슬링을 켜면 빠르게 움직이던 사람들이 갑자기 슬로모션으로 걸어가는 느낌까지 받는다.
어쩌다 노이즈캔슬링 기능이 없는 과거에 쓰던 유선 이어폰을 사용하게 되면 이런 제품을 어떻게 썼을까 싶을 정도로 이 기능에 빠져들게 됐다.
이 기능의 가장 큰 장점은, 세상은 고요해지고 온전히 음악에 집중할 수 있게 해 준다.
가끔 가평 산속에 가면 새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정막과 고요 그 자체의 시간이 있다.
눈은 감으면 쉴 수 있고 장도 먹지 않으면 휴식을 취할 수 있다. 머리도 깊은 수면에 빠지거나 멍 때릴 때 휴식의 시간을 갖는다. 하지만 도시에 살면서 단 1초라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경우가 있을까? 우리의 귀는 24시간 열일한다.
그런 힘든 귀에 조금이라도 소음을 덜어주는 에어팟프로의 노이즈캔슬링 기능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에어팟프로를 얼마 전 당근마켓에 팔았다. 오른쪽 유닛에서 잡음이 들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애플 매장에 가서 AS를 받으려고 찾아가 봤는데, 에어팟의 유닛은 수리의 대상이 아니라 무조건 교체를 해야 한다고 했다. 가격이 무려 13만 원…
에어팟프로 초창기 모델의 고질병이 잡음 발생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한쪽만 교체해서는 나머지 한쪽도 언제 고장 날지 모를 일이었다. 양쪽 유닛을 다 교체한다면 무려 26만 원이다.
현재 인터넷 최저가가 30~35만 원이었고 중고로 미개봉은 25~30만 원 선이었다.
그래서 기존의 에어팟프로를 팔고 새 걸 사기로 했다.
오른쪽 유닛에 잡음이 있다는 내용을 솔직히 올렸다. 처음 가격은 8만 원에 올렸는데 사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 6만 원까지 내렸을 때, 구매하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약속을 잡고 장소로 나갔다. 고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남학생이었다. 대학생이었을까?…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었다. 별 어려움 없이 거래하고 집으로 돌아와 후기를 보냈다. 당근거래 후 후기를 보내는 건 거의 매너에 가깝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지 않아도 나에 대한 후기를 보내지 않아서 그 친구의 아이디로 찾아들어갔는데 어이없는 게시글을 보게 됐다.
나에게 산 에어팟프로를 멀쩡하다고 게시해 놓고 12만 원에 올린 것이 아닌가…
황당하기도 하고 내가 너무 싸게 내놓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괘씸한 마음에 보낸 후기를 취소했다.
그러고 나서 차분하게 생각을 해보았는데 내가 화를 낼 이유가 없었다. 나에게 필요가 없어진 물건을 팔았고 그걸 비용을 지불하고 구매한 사람은 처분의 권리가 생긴 것이다. 12만 원이 아니라 120만 원에 올렸다 해도 그 사람의 자유인 것이다. 물론 하자가 있은 물건이 제가격에 팔릴 수는 없을 것이다. 며칠을 모니터링한 결과 12만 원에서 5만 원까지 내려간 걸 확인한 다음날 거래완료 글자를 확인했다.
세상이 그렇게 호락하지 않다. 싸고 좋은 게 있을 리 만무하다.
아무튼 그렇게 구형 에어팟프로를 팔고 20만 원을 더 보태서 신형 에어팟프로를 역시 당근마켓에서 미개봉신품으로 구매했다.
두 개를 다 사용해 보면서 구형과 신형의 차이점이 몇 가지 있음을 발견했다.
일단 충전방식이 C타입이다. 이점은 나에게는 큰 장점은 아니다. 어차피 아이폰 14 프로맥스를 쓰고 있어서 라이트닝으로 충전하고 있기 때문에 C타입이 아니어도 불편함은 없다. 하지만 범용으로 사용하고 있는 단자라서 있으면 좋다. 또 애플워치 무선 충전기에 본체를 올려놓으면 자석으로 잡히면서 충전이 됐다. 이점은 매우 편리했다. 또 충전을 연결할 때 연결효과음이 들린다. 본체에 스피커가 달려있는 것 같다. 본체 오른쪽에 끈을 달수 있는 고리도 생겼다.
기능적으로는 외부의 소리에 대응해서 음악소리를 자동으로 키워주기도 하고 줄여주기도 한다.
내가 기침을 하거나 목을 가다듬으면 음악소리가 자동으로 작아졌다. 아마도 내가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고 있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 같다. 오른쪽 유닛의 길쭉한 부분을 대고 검지손가락을 위로 올리거나 아래로 내려서 볼륨을 조절할 수도 있다.
이외에는 사실 달라진 점이 거의 없다. 디자인도 그대로이고 무엇보다 구형의 노이즈캔슬링 기능이 훌륭해서 신형과 차이를 느낄 수 없었다.
애플 제품의 장점이 여실히 드러난다. 제품의 디자인을 크게 바꾸지 않고 한번 물건을 구매하면 소프트웨어적인 업데이트로 기능을 최대한 오랫동안 유지해 준다. 지금처럼 하드웨어적으로 문제만 없었다면 계속 사용했을 것이다. 군더더기 없는 멋 부리지 않은 디자인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데 대부분의 애플제품이 이런 디자인 콘셉트를 채택하고 있는 것 같다.
나와 함께 5년을 같이 생활했던 구형 에어팟프로.
출퇴근을 함께 하며 음악과 영화를 들려주었고 영상편집을 할 때, 캠핑장에서 하늘과 바다를 바라볼 때, 가끔 전화통화를 할 때 내 귀에 꽂혀서 제 역할을 해주었는데, 당근마켓으로 여기저기를 떠돌다 결국 되팔아 이문을 볼 목적으로 구매한 놈에게 넘어갔다. 그리고 역시 돌고 돌아 지금은 누군가의 손에서 되팔릴 날만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겠다.
기계엔 영혼이 없지만 인간이 사용한 흔적이 남아있다. 그걸 사용한 인간은 그때의 상황과 분위기를 기억한다.
그래서 나는 조금 괴롭다. 차라리 팔지 말고 멀쩡한 한쪽을 사서 제대로 된 짝을 이뤄주고 누군가에게 넘겼다면 어땠을까…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또는 인강을 듣는 학생에게, 수시로 전화통화를 해야 하는 택배기사 등에게 건네졌다면 스스로의 역할을 다하면서 마지막까지 제 기능을 다하지 않았을까…
인간과 기계를 비교하긴 무리가 있지만
나는 누군가에게 쓸모 있는 사람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