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동네 꼭대기 집
나는 서울 강북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지금의 미아삼거리역과 미아역 사이, 달동네에서 살았다. 당시 그곳은 ‘대지극장’ 뒤로 불리던 곳이었다. 학교가 끝나고 집까지 걸어가는 길은 꽤 멀고 외롭고 가팔랐다. 장대비가 오는 날엔 부모들이 우산을 들고 학교 정문 앞에서 아이들을 기다리곤 했지만, 나는 폭우를 뚫고 뛰어가야 했다. 눈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지는 비 속에서 숨을 헐떡이며 뛰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비록 힘들었지만, 뛰고 나면 가슴까지 시원해지던 기분도 함께 떠오른다.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은 서울 지명에 대한 편견이 적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뚜렷하게 기억한다. 이곳이 얼마나 못 살고 사연 많은 곳이었는지를. 지금은 아파트도 들어서고 거리가 많이 정비됐지만, 당시 그곳은 서울 같지 않은 모습이었다.
대지극장 뒤편은 술집과 여관이 많았고, 리어카 하나 겨우 들어갈 만한 골목길 옆으로 주택들이 빼곡히 늘어서 있었다. 응답하라 드라마에 나오는 쌍문동 골목길도 양반처럼 느껴질 정도다. 달동네에는 창고나 주차장을 개조해 방을 만들고 세를 주는 경우가 허다했다. 나도 그런 주차장을 개조한 방에서 몇 년을 살았다. 가파른 경사를 오르내리는 마을버스는 항상 시커먼 매연을 뿜어냈고, 엔진 소음도 엄청 컸다.
우리 집은 마을 버스정류장 바로 앞에 있어서 나는 버스를 이용하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노출되는 게 싫었고 아는 친구를 만나는 건 더 싫었다. 그래서 가파른 경사를 헉헉대며 올라 집에 도착할 즈음, 마을버스가 지나가면 일부러 천천히 걸었다. 버스가 지나가고 한참이 지난 후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집에 들어가곤 했다. 다행히 우리 집은 달동네 맨 꼭대기라 타는 사람은 거의 없고 내리는 사람만 있었다.
내가 가난이 뭔지를 처음으로 인지한 시기는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이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학교에서는 급식이 시작되었다. 급식은 편리하고 공평했다. 도시락을 싸 가지 않아도 됐고, 다른 친구들과 반찬을 비교당하지 않아도 됐다.
그 무렵, 길거리에서 우연히 몇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했던 고모부를 마주쳤다. 아버지에겐 배다른 형제자매들이 많았는데, 그들과는 교류가 거의 없었다. 고모부도 그런 분 중 한 분이었지만, 나를 반가워하며 이런저런 안부를 묻고는 용돈으로 만 원을 주셨다. 당시 만 원은 정말 큰돈이었다.
고모부에게 돈을 받은 사실을 아버지에게 이야기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나중에라도 알게 될 수 있으니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는 잘됐다며 며칠 후 내야 할 급식비를 그 돈으로 내라고 말씀하셨다. 월 급식비는 약 6천 원 정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괜히 말했나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나머지 돈은 내가 마음대로 써도 된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다음 날이 되었다.
당시 가장 친했던 친구와 학교를 마친 후 중국집에 갔다. 아마도 맨날 얻어먹는 게 미안해서 내가 산다고 데려갔던 것 같다. 1,500원 정도 하던 짜장면을 두 그릇 시켜 먹고 오락실로 향했다. 급식비를 내고도 돈이 좀 남아 오락 몇 판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락실에서는 한 판에 50원 하던 ‘1943’ 비행기 게임을 자주 했다. 꽤 잘했다. 미사일과 총알이 화면을 가득 채우는 속에서 내가 조종하는 비행기는 오래 살아남아 20~30분 동안 게임을 즐기곤 했다. 당시에는 누군가 게임을 잘하면 아이들이 몰려들었고, 나도 그 관심 속에서 탄성을 들으며 게임을 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놀다 오락실을 나왔는데, 얼마 가지 않아 주머니에 지갑이 없음을 알았다. 친구와 함께 다시 오락실로 달려가 기계 위와 주변을 살펴봤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나일론 천으로 된 짝퉁 나이키 지갑 안에는 5천 원짜리와 1천 원짜리 몇 장이 있었는데, 누군가 그걸 주웠다면 큰 횡재였을 것이다. 문제는 급식비를 낼 수 없게 된 나였다. 걱정과 두려움이 몰려왔지만, 원래 없던 돈이라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집으로 향했다.
그날 밤, 아버지가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왔다. 나는 남자답게 먼저 잘못을 인정하고 빌면 용서를 받을 수 있을 거라는 훈훈한 그림을 상상하며 모든 것을 솔직히 털어놨다. 이야기를 다 들은 아버지는 순간 부엌으로 뛰어가 식칼을 들고 왔다. 내가 잘못했다고 빌었지만, 아버지는 스스로 화를 참지 못한 채 소리를 질렀다.
정말 그가 팔뚝만 한 부엌칼로 나를 찌르려 했을까?
그 길로 나는 집을 나왔다. 미아리 달동네에서 안암동까지 걸어가 두어 시간 만에 식당을 하는 고모에게 도착했다. 추위에 떨었던 기억이 없는 걸 보면 겨울은 아니었던 것 같다. 고모에게 급식비를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 사건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칼을 들이댄 행동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가난이 사람을 얼마나 극한으로 몰아가는지는 알게 됐다. 당시 아버지의 주머니에는 아들의 급식비조차 낼 돈이 없었다. 한 가정의 가장이면서 온 집안을 뒤져도 만 원이 나오지 않는 현실이 아버지를 비참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감정을 통제할 방법을 배우지 못했기에 그는 곧장 칼을 들었고, 내가 조금만 대들었거나 반항했다면 정말 찔렀을지도 모른다.
이제 나는 당시의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아졌다. 그가 느꼈을 비참함을 이해하면서도, 어린 내가 받았던 상처 또한 여전히 서글프다.
가난이란 그런 것이다. 그때 그 달동네에는 이런 가난의 사연들이 얼마나 많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