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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기니 Sep 12. 2020

성공하면 실전, 실패하면 연습



얼마 전, 화제가 되었던 한 배우의 수상소감이 한참 귀감이 되어 여기저기 떠돌았다. 상을 받기까지 그 배우는 백 편 정도의 작품에 출연했다. 같은 마음으로 모두 열심히 한 땀 한 땀 흘려가며 작품을 했지만, 하나같이 결과가 모두 달라 신기하다고 했다. 내가 잘해서 잘 된 것도, 내가 못해서 망한 것도 아니라고. 매일같이 열심히 살았어도 빛을 보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어쩌면 한 번 더 포기하지 않을 생명수와 같은 수상소감이었다. 언젠가 나만의 무언가를 만나게 될 자신들을 상상하며.


결국 세상의 빛은 '언젠가'라는 정해지지 않은 시간 속에서 막연하게 존재한다. 우리는 그때를 만나기 위해 하루하루 작은 성취들로 목마름을 축이고, 그날의 빛이 나를 비추기를 소망한다.








살면서 반복되는 크고 작은 성취와 실패, 나는 그것들을 마주하는 태도를 춤을 추며 배운 것 같다. 세상에서 스스로 무언가를 선택하고 처음으로 열심히 해본 것이 춤이다 보니, 인생의 파도가 춤을 타고 넘실대는 순간들이 많았다.



고등학교 때에는 콩쿠르나 학교에서 1등을 하고 상을 받는 달콤한 상상을 하며 연습을 했다. 춤을 잘 추고 싶은 욕망을 채우기 위해 어떤 방법으로든 달리기 시작했다. 연습실에 혼자 남아 손끝 하나를 위해 몇십 번, 몇 백 번이 될지도 모르는 순간들을 거치고, 잘 구르고 잘 뛰기 위해 몇 천 번 몇 만 번이 될지도 모르는 순간들을 마주했다. 보이지 않는 승부욕을 채우기 위해 그때 내가 할 수 있었던 에너지를 내 나름대로 끌어다 썼던 것 같다.



이상했다. 이렇게 땀 흘리고 열심히 하는데도 상복이 없다. 예고도 수석, 1등으로 졸업했지만 그 3년 동안 호화스러운 기쁨만을 누리지도 못했다. 콩쿠르에서 매번 미끄러졌고, 상을 받아도 좋은 성적, 만족하는 성적을 받아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실패들을 시작으로 내가 우물 안 개구리라는 것을 목청껏 울어대며 깨우쳤다는 생각이 든다.



지방 살던 개구리 한 마리가 깡 하나 짐 보따리에 싸 들고 서울로 상경하던 날, 날고 기는 개구리들이 내려다보는 서울 살이가 녹록지 않겠다는 걸 동물적인 감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정말 그랬다. 나는 촌티 나는 보통의 개구리 한 마리 일뿐이었다. 나보다 훨씬 잘나고 대단한 사람들이 덕지덕지 모여있는 곳, 그곳이 서울이었다.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나의 모자란 부분들을 인정하고 배우며 채워나가야 했다. 학교 말고도 따로 레슨을 찾아 듣고, 워크숍을 따라다녔다. 아마 가장 먼저 했던 일은 1등을 갈망하던 나를 지운 일이었을 거다. 패배감이 들었지만 나는 나의 역량이 되는 만큼 살아내기로 했다. 물론 한계가 없다고 말하고 싶지만, 누구에게나 저마다의 한계가 있다. 나도 마찬가지다. 결국 꿈을 꾸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를 인정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대신 내가 확인한 한계 이외에 또 다른 나의 한계를 보기 위해 더 많이 움직였다.



현실의 나를 인정하고 나니, 이다음 수순은 승패 없는 성취와 무한 반복, 연습만이 남아 나를 반겼다.



언젠가 한 번, 연습실에 홀로 남아 땀범벅이 된 나를 거울로 마주했던 날이 있었다. 거울 속에 핼쑥해진 나를 보면서, 나는 이게 죽을 때까지 내가 반복적으로 걸어가야 하는 인생의 톱니바퀴라는 것을 느꼈다. 순간 거울에 비친 내가 사무치게 안쓰럽고 외로워졌다. 싸우는 대상이 없는데도 누군가와  싸우는 것 같고, 분명 주변에 사람이 많은데도 누구도 도와줄 수 없을 것 같은 격한 외로움을 느꼈다. 그럼에도 아, 연습만이 살길이구나. 연습실에서의 지금처럼, 이 정도의 노력은 해야 인생이 제대로 굴러가겠구나 하고.



그날 이후로 나는 나를 조금씩 연습시키기 시작했다. 작게는 생활습관에서부터 크게는 나의 도전들까지. 대신 성공은 잡히지 않는 환상으로 두고, 나의 행복에 더 가치를 두었다. 그리고 이렇게 무거운 세상에 지치지 않도록 조금 가볍게 살아내자고 다짐했다. 그 가벼움 속에는 아마 내가 최고가 아님을, 대단한 무언가가 아님을 인정한 채로 춤추는 것이 춤을 그만두지 않고 계속 출 수 있는 평온한 이유일 테다.



인생은 연습이다.



수많은 도전과 실패를 반복하는 인생에서 넘어져도 탁탁 털고 일어날 줄 아는 힘. 실패하면 좌절의 늪에 기꺼이 빠졌다 용케  빠져나올 줄 아는 용기. 포기라는 허무를 인정하고, 체념하는 나를 자신 있게 마주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마법과도 같은 말. 인생은 말 그대로 연습의 연속인 것이다. 이것이 내가 가지고 있던 삶에 대한 무게와 부담감을 한방에 무력화시키고 해방시켜주던 고마운 '키'이다.



살다가 어느 때에 지치고 무너지는 순간이 오면, 인생은 연습이라고 다시 나에게 말한다. 실패해도 괜찮다고. 떨어지면 다시 하면 되고, 실패하면 또다시 하면 된다고. 그러다 언젠가 한 번 성공하는 순간이 오면 '역시 최고의 실전이었어' 하고 내 멋대로 말을 바꾸면 된다.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글에 대한 작은 성취감과 오늘도 떨어진 지원서류에 착잡하지만, 나는 이제 이 지원서류가 떨어졌다고 삶이 끝나지 않으며, 하나의 성취를 이뤘다고 내 인생이 짠하고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것들이 나의 삶 자체를 흔들 수 없음을 안다. 그러니, 실체가 있는 실전이란 내게는 없는 거다.  



언젠가 진솔하고 담담하게 말하던 그 배우의 수상소감에서처럼, 계속해서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걸어가다 보면, 실전의 날 나만의 빛을 만나게 될 거다.



어떤 경우에도 실전이란 무게로, 넘실대는 바다에 던져진 나를 덜덜 떨며 내몰지 않도록 조심하자. 어쩌면 겁을 집어 먹었을지도 모를 나에게, 단단하고 안전한 배 하나 태워주고, 세상만사 모두 밝힐 수 있는 랜턴 하나 챙겨 넘실대는 파도 위, 기꺼이 춤을 추며 항해할 수 있도록 그 또한 연습해야지.



인생은 성공하면 실전, 실패하면 연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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