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4 두장 짜리 납량 소설을 써봤습니다.
빗소리가 줄어드는 게 느껴졌고 칼에 찔린 고통도 어느 정도 줄어들었다.
다만 찔린 부위가 복부라서 그런지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 고통이 달랐다.
공기를 마실 때는 몸에 들어온 칼이 더 깊이 들어오는 느낌이고 공기를 내뱉을 때는 제대로 다시 찌르기 위해
칼을 뽑아내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건 눈동자 말고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칼에 찔리고 나서 그녀를 밀어내며 뒤로 쓰러졌는데 그때 뒤통수가 뭔가에 강하게 부딪혔고 그 충격으로
몸이 옆으로 틀어져 지금은 엎드린 자세로 쓰러져있다.
쓰러질 때 느낌으론 거실 테이블이었을 거다.
원룸 거실 테이블은 폐타이어 두 개 쌓아서 그 위에 유리를 둥글게 모양 떠서 올려놓은 거였다.
충격으로 유리가 깨진 것 같진 않으니 대신 내 두개골이 어찌 된 것 같다.
그녀가 담배를 피우기 위해 열어놨던 창문으로 비가 들어오고 있는 게 보인다.
저렇게 많이 열어놓을 것까진 없었는데..
조금만 닫으라고 두 번이나 얘기했었는데..
내 얼굴 보고 있으려니 구역질 난다며 쏟아지는 비라도 봐야겠다고 했다.
그렇게 꼴 보기 싫은데도 굳이 찾아와 확인하고 싶었던 게 뭐였더라?
장마철이었지만 다행히 빗줄기가 약해져서 지금은 분무기로 칙칙 쏘는 정도이다.
가로등 불빛을 미끄럼틀 타듯 실내로 들어오는 빗방울들이 예뻐 보였다.
예뻐 보인다는 건 아직 의식이 남아있다는 거겠지?
생명엔 지장이 없다는 거겠지?
조금 전부터 온몸을 파고드는 한기가 그런 판단을 헷갈리게 한다.
한 시간도 안 된 것 같은데 머릿속에 여러 개의 싱크홀이 생긴 것처럼 기억이 여기저기 내려앉아있다.
왜 또 말다툼을 하게 됐는지,
왜 그녀의 뺨까지 때리게 됐는지,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내 병째 한 모금 마시고는 내게 권하던 그녀가 왜 다른 손엔 칼을 들고 있었는지..
사방은 조용하고 꼼짝할 수가 없으니 그녀가 어딨는지 알 수가 없다.
한때 애인을 이런 꼴로 만들어놓고 도망친 걸까?
119라도 불러주지.
다시 빗줄기가 굵어졌다.
커진 빗소리와 함께 내 호흡도 아니 내 고통도 다시 커졌다.
정말 날 죽이려고 했을까?
비극적인 사랑의 끝에서 그녀는 '정당방위'라는 어색한 구원을 받을까?
갑자기 창문 안으로 바람이 세차게 불어왔다.
창문에서 몇 걸음 떨어져 있는 내게도 빗방울이 날아올 정도였다.
좁은 원룸 안을 무성의하게 돌아보고 나가는 비바람에 이끌려 뭔가가 내 얼굴 위로 떨어졌다.
종이조각 같았다.
혀끝으로 그쪽 뺨을 밀어내보려고 했지만 신음소리만 낼뿐 혀도 주인의 지시를 알아듣지 못했다.
그사이 바람이 불었었나?
뺨 위에 있던 것이 떨어졌고 그것은 착하게도 내 시야 안에 착륙했다.
반으로 찢어진 사진.
어느 바다였더라?
파도가 무모하게 기어오르는 절벽이 저 뒤로 펼쳐져있고 그 배경 앞에서 상반신만 찍힌 나는 촌스런
야자수 무늬 셔츠 차림으로 환하게 웃고 있다.
주인 없는 팔이 깊게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원래 사진엔 그 팔 주인이 내 얼굴에 뽀뽀를 하고 있지만 지금은 가녀린 팔 한쪽만 내 어깨에 걸어놓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얼굴 한쪽이 뜯겨나간 상태로 웃고 있는 나 자신이 무섭다고 느껴졌을 때 눈치 없이 졸음이 쏟아졌다.
난 안다. 잠이 아닐 거란 걸..
어차피 장마철이니 긴 잠도 좋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