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4 소설
<가>슴 떨리는 흥분이 쉽게 가라앉질 않는다.
10분 휴식시간으로는 이성을 되찾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나>도 잘 해내고 싶지만 머리와 감정과 몸이 며칠째 별거 중이다.
"<다>시 해볼게요."라는 연출의 차분한 목소리를 여섯 번 정도 반복해서 듣고
"10분 쉬었다가 이 장면부터 다시 할게요."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K는 바깥공기를 마실 수 있었다.
<라>디오 심야방송 디제이 같은 목소리로 열댓 명의 배우들을 다스릴 수 있다는 게 극의 분위기와
그의 연출력을 대변해 준다고 할까?
<마>치 "저는 얼마든지 반복할 수 있어요. K씨가 해낼 때까지.."라고 하는듯한 연출의 미소를 뒤로 하고
K는 옥상으로 올라왔다.
<바>다가 보고 싶어졌다.
두 글자로 하면 '도망'이라고 해야 하나..
구름 한 점, 배 한 척 보이지 않는 바다로 그를 던져 넣고 싶었다.
<사> 라지고 나면 그 뒤는 어떻게 될까?
원하는 결말은 '유망한 연출가의 어이없는 실족사'지만 그냥 10분짜리 가상 드라마라고 해두자.
<아>직은 견딜만했다.
스님 역할이라기에 머리 밀고 갔다가 사흘뒤 역할 잘린 적도 있지 않았던가!
"<자>판기 커피 안 뺐네요?"
등뒤에서 들려온 연출 목소리.
아차! 그러고 보니 자판기 눌러놓고 외면한 채 먼산만 보고 있었다.
<차>갑게 식어가는 내 커피를 자기 커피가 깔고 앉아있는 꼴을 잠시 보고 있더니 연출은 폭소를 터트렸다.
"하하하! 이거.. 우리 둘 닮지 않았어요? 하하하하!"
오른손으로는 웃느라고 아픈 배를 안고 왼손으로 새 커피를 내민다.
"블랙 드시죠? 당 떨어지셨을 테니 밀크로 뽑았어요. 설탕 추가 눌러서.. 괜찮으시죠?"
<카>악! 가래를 뱉어 넣고 싶었지만 K의 입에선 뜻밖의 애드립이 새어 나왔다.
"가.. 감사합니다. 역시.. 센스 있으시네요."
자기보다 십 년은 훨씬 더 오래된 K의 좁은 어깨를 주무르던 연출은 꾹 손에 힘을 주었다.
"<타>성에 젖기 시작하면 연기는 죽어요. 블랙만 고집하지 말고 때론 밀크도 마시고 율무차도 마시고..
분유맛 나는 우유도 마시고.. 저 고물 자판기에서도 얼마든지 좋은 연기 뽑아낼 수 있는 거잖아요.
안 그래요?"
'뭔 개소리지?'
"<파>트 타임 알바를 하루에 세 개나 하신다고요? 와.. 그럼 대본 볼 시간 없으시겠다.
모든 길은 대본 안에 있는 건데.."
<하>아.. K는 받아 들고 있던 밀크커피를 옥상 너머로 던졌다.
그 와중에 그냥 버리는 것이 아니라 좌에서 우로 팔을 돌리며 양 조절마저 기막히게 해서
허공에 뿌려지는 커피가 마치 갈색 바다의 수평선처럼 보이게 했다.
그리고 K는 연출의 몸뚱이를 가볍게 들어 그 바다를 향해 던져버렸다.
어디선가 갈매기 소리가 들렸던것 같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