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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무균 Oct 01. 2021

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

기억을 지탱하는 건, 흔히, 시작도 끝도 없는 작고 기이한 파편들이다

   “전쟁에 관한 최고의 소설 목록에서 상위에 속한다. 베트남의 경험을 모든 사람에게 구체적으로 안겨주고 모든 전쟁 이야기의 본질을 밝힌다.” 뉴욕 타임즈가 ‘20세기의 책’ 선정의 말에서 극찬한 책 ‘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 The Things They Carried’. 나는 이 책을 “어떤 자살은 가해였다. 아주 최종적인 형태의 가해였다.”라는 의미심장한 문장으로 사회에 일침을 가한 장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를 모두 읽고 난 후 곧바로 읽기 시작했다. 2020년 12월 14일 오후였다. 두 책의 인과 관계는 전혀 없었다. 그리고 열하루가 지난 12월 24일 코로나19로 조용한 크리스마스 전날 300쪽이 채 되지 않는 이 책의 독서를 겨우 마칠 수 있었다. 오후 3시를 막 넘어서고 있었고, 비 또는 눈이 내릴 것이라는 기상청의 예보와는 달리 햇볕이 쨍쨍한 영상의 포근한 날씨였다. 그리고 이날 1,241명의 코로나 확진자가 새로 생겼고, 열일곱 명이 죽었다. 전쟁은 오래전 일이었다.


   ‘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은 지난 8월 말 친구 J가 내 여행경비로 보내 준 9권의 책 중에 포함되어 있던 책이었다. 나는 이 책을 5월인가 6월인가 신문 서평란에서 읽고 핸드폰의 ‘살 책들’ 메모 폴더에 기록해 두었다가(한때 베트남전 소설에 대해 무척 관심이 많았다. 안정효의 ‘하얀전쟁’, 황석영의 ‘무기의 그늘’, 박영한의 ‘머나만 쏭바강’을 읽고 베트남에 대한 근거 불명의 환상을 가지기도 했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전쟁은 영화도 소설도 아니었고, 단지 전쟁일 뿐이었다. 엿 같은 것이었고, ‘Kick the bucket’, 골로 가는 것이었다.) J에게 “내 생활비 항목에 도서비 계정이 없다네.”라며, 굳이 추사秋史와 다산茶山의 예를 들진 않았지만 은근히 사서 보내줄 것을 요구했었다. 그러자 이내 책이 도착했다. 하지만 책을 책상 위의 독서대에 올려놓기까지는 무려 세 달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한 달 넘게 ‘신들의 봉우리’를 읽고 있었고, ‘나무의 시-간’과 ‘만년필 탐심’을 다시 읽었으며, 진도가 잘 나가지 않는 애나 번스의 ‘밀크맨’과 성석제의 짧은 소설(엽편소설인지 에세이인지 잘 구별되지 않는) 한 권도 틈틈이 읽고 있었다. 그리고 글 첫머리에 썼듯이 장세랑의 ‘시선으로부터’를 읽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은 긴 줄 뒤에서 아직 차례를 더 기다려야 했다.


   이 책의 저자 팀 오브라이언은 1968년 징병되어 1969년부터 1970년까지 2년 여간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귀국 후 그는 하버드 대학원을 다녔고, 워싱턴 포스트에서 인턴기자생활을 하다 산문과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특히 베트남전 참전의 기억,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전쟁과 엿 같은 전투의 디테일(똥 밭에서 포탄에 맞아 처참하게 찢겨진 카이오와의 시신을 보라!)을 기억에서 소환하고, 전쟁 트라우마로 정상적인 사회생활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참전 동료들의 후일담을 소재로 다양한 글을 썼다. 글쓰기는 그가 베트남에서 겪은 상처, 정신적 외상을 치유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 그리곤 그렇게 쓴 단편들(진실한 전쟁 이야기를 들려주는 법, 뜨라봉강의 연인, 유령군인, 죽은 이들의 삶, 레이니강에서, 내가 죽인 남자 등)을 모아 1990년 ‘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이라는 제목의 장편소설로 출간했다. 그래서 각 단편들은 발표 시기가 다르고, 발표된 잡지들도 다르다. 하지만 이 책에 나오는 스물두 편의 이야기들–어떤 것은 그 자체로 최고의 단편으로 인정받고 있다.-은 모두 베트남전이라는 하나의 몸통에서 나온 줄기로 같은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 대표적인 소설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 마르셀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것을 찾아서’, 이인성의 ‘낯선 시간 속으로’ 등이 있다. 이상의 시 ‘오감도’나 소설 ‘날개’도 들 수 있겠다. )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것들은 익숙해서 무감각해지고 무미한 전쟁의 일상과 이후의 트라우마, 그리고 치유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은 베트남 참전 자전적 소설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무수한 매체들이 지극한 찬사를 보냈다. 보스턴 글로버는 “오브라이언은 너무 직관적이고, 또 독자를 너무 달아오르게 만들다 못해 뒤에서 헬기 소리가 들리는 듯한 책을 써버렸다”고 했고, 댈러스 모닝 뉴스는 “나는 당신에게 이 책을 읽혀야만 한다.... 만약 내가 당신이 밖에 나가 이 책을 사도록 만들지 못한다면 나는 당신을 망친 것이다.”라고 했다. 뉴욕 타임즈는 “신중하고 경이로운 스토리텔링, 헤밍웨이식의 선명하고 감상에 빠지지 않는 어조에다 더 다정하고 더 서정적인 묘사를 결합한 산문 속에서 오브라이언은 20파운드의 보급품, 14파운드의 탄약 말고도, 무전기, 기관총, 돌격소총과 수류탄을 짊어지고 부비트랩이 즐비한 정글을 저벅저벅 걸어 나가는 게 어떤 느낌인지 충격적인 내장 감각을 전달한다.”며 독자가 실제 전쟁터를 경험하고 있는 문장이라 극찬했다.(실제 이 책은 글쓰기의 전범으로 대학과 일반 북클럽, 나아가 중·고등학교 필독서로 선정되며 끊임없이 읽히고 있다. “나는 용기가 우리에게 유산처럼 유한하게 주어지므로 그걸 절약의 자세로 은행에 넣고, 그 이자로 도덕적인 자산을 꾸준히 부풀려 훗날 계좌에서 인출할 때를 대비하는 게 옳은 줄 알았던 것 같다.”라든지 “나는 가끔씩 두려움이 내 안에서 잡초처럼 무성해진 느낌이 들었다.” 같은 문장을 읽을 땐 이 책이 왜 글쓰기의 전범이 되어 북클럽에서, 중·고등학교에서 필독서로 읽히게 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가끔 전쟁이나 후일담보다 이런 문장과 표현을 찾아 읽는데 더 집중했는데, 책이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과는 관계없는 것들이었다.) 옮긴이 또한 “전쟁문학의 범주는 이 책을 가두기에 너무 좁다.”며, “삶과 죽음, 기억과 글쓰기, 상처와 치유에 관한 넓은 이야기”라고 이 책을 평하고 있다. 나는 책 말미에 나오는 37개에 달하는 ‘이 책에 쏟아진 찬사’를 모두 읽고, 첫 에피소드 ‘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을 다시 읽었다. 하지만 책 읽기를 바로 마친 후에도 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은 무려 29페이지에 달할 정도로 종류도 다양하고 가짓수도 많았다.


   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은 필수품이었다. 깡통 따개, 주머니칼, 고체연료, 손목시계, 인식표, 모기 퇴치제, 껌, 초컬릿 바, 담배, 정제 소금, 라이터, 성냥, 반짇고리, 전투식량....이었다. 이것들을 합하면 5.5~8킬로그램이나 나갔다. 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은 진정제, 마리화나, 만화책, 성경, 콘돔, m&m’s 초컬릿, 애인 사진, 여자 친구의 팬티스타킹, 손도끼, 부적, 일기장....이었다. 각자의 성격과 믿음에 관한 것들이었다. 어떤 것은 몇 백 그램이 나갔고, 또 어떤 것은 3킬로그램에 달했다. 그들에겐 모두 1그램도 버릴 게 없는 것들이었다. 소대장은 소대장에게 필요한 것들을 가지고 다녔고, 병사들은 병사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가지고 다녔다. M16 자동소총, M60 기관총, M79 유탄발사기, 탄약, 클레이모어 같은 살상 무기들은 전투에 꼭 필요한 것이어서 가지고 다녔다. 이것들은 사람의 목숨만큼이나 그 무게가 더 무거웠다. 그리고 그들은 기억의 무게, 자신의 목숨(탕, 턱 하고 죽기 전까지의), 온갖 감정의 수하물(두려움, 비탄, 공포, 사랑, 갈망, 광기, 죄책감....), 그리고 거 봐!(There it is!)라는 상투적인 말을 가지고 다녔다. 이것들은 무형이어도 나름의 질량과 비중이 있었고 유형의 무게가 나갔다. 그리고 그들은 가지고 다녔다. 수치스러운 기억, 간신히 억눌러둔 비겁함, 도망가거나 얼어붙거나 숨으려는 본능에 관한 공동의 비밀을 가지고 다녔다. 여러모로 이것은 가장 무거운 짐이었다.


   나는 책 읽기를 마치고 잠시 내가 가지고 다니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신분증과 신용카드 몇 장과 얼마의 현금이 들어 있는 지갑, 집 열쇠, 손수건, 휴대폰, 마스크, 가끔은 안경을 가지고 다니기도 했다. 내가 가지고 다닌 것들은 한 두 줄에 불과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유형적인 것들이었다. 필사적必死的인 목표를 가진 것도, 필생必生의 목표를 가진 것도 아닌 그냥 살아가는 데 필요한 습관적인 것들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진실로 가지고 다닌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

희망, 기대, 걱정, 절망, 분노, 좌절, 부끄러움...., 사실은 이 무형의 무엇들이 진정 내가 가지고 다닌 것들이 아니었을까? 오래전 전쟁터에서 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처럼.


https://blog.naver.com/moogyun/222187804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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