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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무균 Oct 01. 2021

꼭 원목의 독서대가 필요했을까

명창정궤를 꿈꾸는 작은 서재를 위한 허세

   사무실에서야 어쩔 수 없이 책상에 앉아 책을 읽었지만, 집에서는 주로 침대에 누워 책을 읽었다. 오래된 습관이기도 했지만 또 오랫동안 내 몫의 책상이 따로 있지 않기도 했다. 4년 전 지금 사는 아파트로 이사를 하면서 조금은 허세, 혹은 꿈꿔온 명창정궤(明窓淨机, 햇빛이 잘 비치는 창밑에 놓여 있는 깨끗한 책상. 깨끗이 정돈된 고졸한 서재)를 실현한다는 구실로 작은 서재를 꾸몄다.(아파트를 분양을 받을 당시 패밀리 키친이나 방으로 선택 가능한 옵션 공간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방으로 하겠다고 말했었는데, 이때부터 사실 이 방은 이미 서재로 꾸며져 있었다.) 그리곤 가구 단지로 유명한 봉담(경기도 화성 봉담에는 가구단지가 있어 이사를 하거나, 새로운 살림을 마련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까지 가서 원목으로 된 책상 하나를 마련해 서재에 들여놓았다. 책상은 작은 서재에 비해 다소 큰 듯도 했으나, 심플해 전체적으로 서재와 잘 어울렸다. 책장은 이전에 사용하던 것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했는데, 10년을 넘게 사용했으나 원체 판이 두껍고 튼튼해 그 수명을 짐작할 수 없는 책장이었다. 하지만 책장은 80cm짜리가 다섯 칸이나 되어 작은 서재에 다 들어가지 못하고 네 칸만 들어가는 이산의 아픔을 겪었다. 남은 한 칸은 자리를 찾다 안방 침대 옆에 놓아두고, 사 두기는 했지만 읽지 않았거나 못한 책들, 혹은 조만간 읽을 책들을 꽂아 놓는 용도로 사용했다.


   이사를 하고 처음엔 서재라 이름한 곳에 몇 번 방문하기도 했으나, 서재에 자주 들어갈 이유도 시간도 많지 않았다. 이후 서재는 주로 자전거, 골프백, 골프백에 따라다니는 보스턴 백, 갈 곳 없는 사진액자, 각종 가방 등 집안에 마땅히 둘 곳이 없는 물건들의 거처로 변하기 시작했다. 한동안은 전자드럼이 자리를 차지하고 아내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공간이 되기도 했으나, 종내 서재의 주된 임무는 창고로서의 역할이었다. 그러다 최근 코로나19가 비대면 접촉을 강권하고, 이 상황이 교육에까지 파급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면서 서재는 아들의 온라인 수업 방으로 사용되었는데, 그나마 이것이 서재로서의 가장 충실한 역할이었다.


   은퇴(?)를 하고 나서 아침 시간이 참 난감했다. 망연한 시간 한 뭉텅이가 그냥 ‘툭’하고 내게 던져진 것이었다. 원래가 새벽형 인간이라 일찍 일어나 출근 전 산에도 가고, 피트니스센터에서 헬스도 하고 했지만, 차고 넘치는 게 시간인 은퇴자가 굳이 새벽에 일어나 이런 것들을 할 필요는 없었다. 이런 것들은 여삼추인 낮 시간에 아주 자유롭게 충분히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당황스러웠다. 배달된 신문을 읽는 데는 10분이면 충분했고(이미 전날 인터넷을 통해 웬만하면 읽은 내용들이다.), 인터넷 뉴스 검색도 별 다를 게 없었다. 슬라이스(slice)로 얇게 저민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의 시간 사용 계획이 필요했다.


   머릿속으로 정한(굳이 종이에 그리거나 표를 만들어 벽에다 붙여놓을 필요는 없다.) 시간 사용 계획서에 따르면 우선 오전 시간은 읽기와 쓰기의 시간이다. 어쩌다 다른 오전 일정이 생기면 다른 그 일정이 먼저라고 머릿속에 순서를 정리해 두었다. 그럼 오후는? 현재의 신체 골격을 유지시켜 줄 운동, 어쩌다 생기는 볼 일, 또 어쩌다 생기는 약속 등 기타 등등의 것들을 하는 시간으로 정했다.(물론 오후 시간에도 오전의 일들이 기분 좋게 유지된다면 오전에 하던 것들을 계속하기로 마음먹고 있기는 했다.) 며칠을 이 시간 사용 계획에 따라 실천을 했는데, 독서와 쓰기의 장소로 서재가 적격이었다. 이제야 서재가 제 역할을 제대로 찾은 것이고, 시간 사용 계획이 바로 서자 서재의 역할도 바로 잡힌 것이었다. 그런데 불편했다. 쓰는 것이야 컴퓨터 자판에 치는 것이어서 책상에서 하는 것이 익숙했지만, 읽기는 책의 양 표지 면이 책상에 닿게 하고 읽자니 머리가 앞으로 나아가고 고개가 숙여져 자세가 불편했고, 한 손으로는 책을 눌러주어야 해 손도 자유롭지 못했다. 책 밑을 책상에 닿게 세워 책을 두 손으로 잡고 읽자니 이 또한 두 손이 자유롭지 못해 불편했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보면대(譜面臺, music stand)가 아닌 독서대(讀書臺, a reading desk)가 필요했다.(아직도 독서대를 생각하면 보면대라는 말이 먼저 떠오르는데, 아마 아내가 전자드럼을 치면서 자주 보면대를 언급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독서대에 책을 놓고 보면 우선 두 손이 자유롭고, 자세가 곧아질 것이었다. 독서대 하나를 마련하기로 마음먹었다.

황석영의 '철도원 삼대'가 내 기품 있고, 고고한 독서대 위에서 진도를 재촉하고 있다.


   나머지는 아내가 해야 할 일들이었다. 아내는 바로 인터넷에서 독서대를 찾아 나에게 보여주었다. 플라스틱이나 합성목, 메탈류 등으로 만들어진 것들이 대부분이었으나, 나름대로 디자인도 예쁘고 깔끔해 독서대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게 제작된 것들이었다. 이중 가격도 적당하고, 디자인도 세련된 제품이 있어 그것을 사기로 했으나, 아내가 좀 더 멋진 작품(?)을 찾아보겠다고 해서 나는 그렇게 하라고 했다. 육법전서를 읽는 것도 아니고 지금 당장 독서대가 없다고 책을 못 읽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책은 누워서 읽을 때가 가장 편하다. 하지만 누워 책을 들고 읽으면 양팔이 많이 아파 자주 자세를 바꿔줘야 한다. 그래서 누워서 책을 읽을 수 있는 독서대가 나왔다.) 며칠 후 아내가 멋진 독서대 하나를 보여주었다. 격자무늬의 독서대는 원목을 깎아 끼워 맞추고, 스프링을 연결한 경첩을 달아 책을 위아래 모두 고정시킬 수 있었는데, 윤기가 흘러 기품 있었고, 자태 또한 고고했다. 문제는 가격이었다. 다른 일반 독서대 보다 가격이 4~5배는 더 비쌌다. 하지만 이제 다른 독서대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내는 내게 보여주지 말아야 할 것을 보여주었고, 나는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다. 후폭풍은 컸다.


   다음날 아내와 나는 직접 실물을 보기로 했다. 인터넷에 나오는 판매처는 강남의 어느 주택가에 있는 빌딩 지하에, 정말이지 찾기 쉽지 않은 곳에 있었다.(손님이 우리밖에 없었다.) 매장은 넓지 않았으나, 매장 이름답게 그곳에는 만년필, 볼펜, 필기구함, 독서대, 파우치, 잉크 등 필기구나 책과 관련된 제품들이 아담하게 진열되어 있었다.(안 보이는 한쪽은 물류창고로 사용하는 듯했다.) 진열대에 원하던 독서대가 보이지 않아 직원에게 부탁하니 보이지 않는 물류창고 한쪽에서 박스 하나를 들고 나왔다. 독서대의 실물은 좀 큰 듯해 가방에 넣고 다니기에는 다소 큰 크기였고, 두께도 사진보다 더 두꺼워 보였다. 하지만 들어보니 무게는 가벼웠고, 색깔은 사진보다 더 윤기가 났다. 다소 헐거워 보이던 격자무늬도 실제로 보니 품격에 맞게 만들어진 듯했고, 이음새 하나하나까지 정교하게 잘 맞춰져 있었다. 무슨 나무로 만들었냐고 직원에게 물어보았더니 오리나무라고 했다. “오리나무는 표면이 매끄럽고 단단하며 나무의 결이 촘촘하고 고운 편으로 주로 토목 용재, 조각재, 악기용으로 많이 쓰인다.”고 독서대 설명서에 나와 있다.(어릴 적 내가 살던 고향 마을 앞산에도 오리나무가 참 많았는데, 땔감 외에는 쓰일 곳이 없는 나무가 오리나무였다.) 오리나무와 아무 관계가 없는 아내와 나는 독서대를 인터넷 가격으로 할인받고(할인받기 위해 아내가 인터넷에서 어쩌고 저쩌고 뭐 이야기를 했더니 직원이 바로 쿨하게 할인해 준다.) 흔쾌한 마음으로 구매했다. 이제 나의 명창정궤를 꿈꾸는 작은 서재는 독서대만큼 기품 있고, 독서대만큼 고고해져 더욱 서재다워질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책상 위에 독서대를 놓으니 초록은 동색이라 같은 원목의 독서대와 책상이 무척이나 잘 어울렸고, 독서대에 책을 고정해 놓고 읽으니 두 손이 편하고, 독서 자세가 곧아져 올해 한 일 중 잘한 일중 하나로 꼽을만했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 하나. ‘그런데 꼭 원목으로 만든 독서대여야 했을까? 탐심貪心, 혹은 허세가 아니라면.’ 오래도록 카드결제 영수증을 들여다보던 아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P.S : 매장에는 팰리컨 파커 등 만년필과-대부분 제품은 많으면 30% 정도 할인을 하고 있었는데, 몽블랑은 제 가격을 모두 받는 것 같았다.- 파우치 등 탐나는 물건들이 자주 눈에 띄었는데, 5단으로 된 원목 필기구함은 특히 탐이 나서 자주 들여다보았다. 아내가 사려면 사라고 했지만 나는 거절했다. 펜들은 그냥 책상 서랍에 두어도 될 것들이었고, 필기구함은 결국 내 탐심貪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사실 내 서재에 정말 필요한 것은 의자였다. 내 책상 앞에는 아직 4년 전 이사를 할 때 원목 식탁에 딸려온 식탁의자가 놓여있다.


https://blog.naver.com/moogyun/222037052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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