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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무균 Oct 08. 2021

백수지도 百手之道Ⅱ, 백수삼락 백수이우

   어제 낮부터 마신 술과 숙취로 하룻밤을 꼬박 자고나서야 일어난 아침, 정신이 혼몽昏懜함에도 취중에 뭔가 실수한 것은 없나 하고 곰곰이 어제의 일을 반추하는데 ‘까똑’하고 카톡 알림이 울려 열어보았더니 ‘오늘은 이 시로 인사’라는 글과 웬 SNS 주소 하나가 떴습니다. 궁금한 것은 못 참는 성미라 얼른 열어보았더니 시인 친구(박완호, 1991년 『동서문학』으로 등단. 시집 『누군가 나를 검은 토마토라고 불렀다』 외 다수. 김춘수시문학상 수상 등)의 신작시 하나가 ‘훅’ 하고 다가왔습니다. 그렇습니다. ‘훅’하고 말입니다.


사모


                                        박완호


한 아홉 번쯤 더 태어나면 어디쯤에서

당신과 나 또 엄마 아들 되어

오래 아프면 더 좋을 당신을 업고

산이든 바다든 맘껏 돌아다니게 될까?


그게 아니라면 딸과 아비 되어

아가, 이것도 저것도 한번 먹어보렴

안고 업고 쓰다듬어가며

한세상 끝까지 가볼 수 있을까?


아내 잃고 꺼이꺼이 우는 사내의

등 접힌 그림자 어루만지며 가는 길

잎 반쯤 떨군 벚나무 가지 사이

옹이 진 채 고꾸라지는 달빛


먹먹했을 그 맘 되짚어 보다

마음 살 베이는 쉰 살배기의

물컹해진 속내를 누가 알까?


어디서 우리 잠깐 스치기라도 하면

모르고도 눈시울 금세 붉어질 텐데


   금세 시를 읽곤-보시다시피 호머의 ‘일리아드와 오딧세이’도 아니고 뭐 짧은 詩인 관계로 오래 걸릴 일이야 없지 않겠습니까?- 알 수 없는 감동이 약간 치밀어 오기에 뭐라고 답장을 쓰나 하고 침대에 누워 다시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 보살처럼 다리를 꼬고, 눈을 게슴츠레하게 내려 깔고 한참을 생각하는 차에 어디선가 일성호가一聲胡笳가 들리기에 고개를 치어드니 저의 오랜 동거인인 아내가 “오늘 아들 중간고사 첫날인데 학교에 좀 데려다 줄 수 없겠냐.”고 합니다.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냉큼 차 열쇠를 챙겨 들고 KF94 마스크를 꼼꼼히 눌러쓰고 “어서 가자 바삐 가자 늦게 가면 0점이다. 어제 밤 센 국어 공부 도로아미타불이다.”를 외치며 아들을 재촉했습니다. 하지만 운전을 하면서 또 생각하기를 뭔가 좀 색다른 문장을 창작할 수 없나 연신 머리를 굴리며 친구의 카톡 답장에 정신이 팔려있었는데, 마침 천 년도 훨씬 더 전에 경주에 있었다는 황룡사-1238년 몽골군의 침략으로 지금은 불타 없어졌음-벽에 솔거가 그렸다는 소나무인지 금당벽화인지가 떠오르기에 “박 시인, 옛날 솔거가 황룡사 벽에 소나무를 그렸더니 새가 앉으려 날아들었다가 벽에 부딪혀 이승을 하직하여 삼도천三途川을 건넜다던데, 혹시 부인께서 편찮으신가? ‘사모’큰 감동을 주고, 또 받는 詩일세. 고맙네.”라고 답장을 하려다-왜 고마운 지는 잘 모르겠지만-답장이 너무 짧은듯해서 최근 깨달은 백수의 도를 첨가하여 보냈사온데 내용인즉슨 이러합니다.


   “친구들, 내가 일 년을 넘게 백수로 살다보니 선종禪宗의 육조六祖이신 혜능(慧能. 중국 唐. 638~713)대사께서 일자무식이면서도 돈오頓悟(百尺竿頭進一步, 백 척의 장대 머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갑자기 깨달음)하여 뜻 모를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어느 곳에도 마음을 머물지 않게 하여 마음을 일으키라.)’과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본디부터 실재하지 않고 비어있다는 뜻)’의 깨달음을 얻으시듯 나 또한 이 기간 동안 지난번에 이어 또 한 가지 큰 깨달음의 기연奇緣을 얻었는데, 백수의 세 가지 자유로움과 두 가지 자유롭지 못함이 그것일세. 댓구를 맞추기 위해 자유롭지 못함에 대한 것도 신수(神秀, 중국 唐 때의 선승禪僧)처럼 점수漸修(일종의 단계를 거치는 점진적 수행)하여 조만간 하나 더 추가할 계획이라네. 친구들도 생각나면 이야기 해 주시게.”라고. 하지만 제 속내에는 친구들이 아직 미백수未白手인 관계로 저 같이 높은 수준의 경지에 도달할 리 만무이지 않겠느냐는 얕봄이 없지 않았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세 가지 자유로움이란 첫째, 시간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일세. 백수의 장점중 하나가 사방에 늘린 것이 시간이라는 점이네. 그렇다보니 시간을 필요로 하는 어떠한 일에도 그냥 옆에 늘린 시간을 가져다 쓰면 되는 자유로움과 또 시간에 쫒기지 않는 자유로움을 얻게 되었는데, 이는 가히 백수의 천하일락天下一樂이라 부를 만하다네. 둘째, 사람 즉, 관계로부터의 자유로움일세. 사람들이 가장 많이 받는 스트레스가 사람들 사이에서 오는 스트레스라고 하네. 그런데 백수가 되고 보니 어느 누가 어떠한 者가 뭐라 해도 내가 안 보면 그만이더군. 이는 타인에게 구속된 바가 전혀 없음인데, 다른 누구에게 생활이나 다른 어떤 것으로 의존되지 않는 한 나는 완전한 자유라는 뜻일세. 조르바가 자유로운 이치와 완벽하게 일치한다네(I am free. Eimai defteros). 이것이 백수의 이락二樂일세. 셋째, 공간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일세. 어느 시간 어느 산이든, 어느 순간 어떠한 바다든 나는 있을 수 있네. 내가 있는 곳이 곧 나의 존재, 내가 예비하는 성소聖所일세. 불편한 어느 곳에도 내가 없을 수 있는 자유, 세상에 이만한 자유가 또 어디 있겠나? 이 세 가지 자유로움이야말로 백수의 진정한 삼락三樂이라 할 만하다네.


   그렇다면 두 가지 자유롭지 못함이란 또 무엇이냐. 첫째는 돈(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일세. 경제적 부자유라고도 한다네. 돈 없이는 하루도 살 수가 없는 것이 자본주의사회인데 돈 쓸 일은 흥부네 집 끼니 돌아오듯 하고, 쌀 동이는 마른 논에 물 빠지듯 하는데, 하는 일 없이 도식徒食하다보니 수입은 땡전 한 푼 없고, 주위에 늘린 시간이나 바람(風)을 가지고는 밥과 바꿀 수 없으니 이것이 자유롭지 못함의 첫 번째 일세. 두 번째는 동거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함일세. 내가 그동안 근 30여 년을 직장생활을 하면서 밥과 교환이 가능한 경제적 부富를 아직까지는 다소나마 보유하고 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동거인의 성화를 아마 견딜 수 없었을 걸세. 현진건의 ‘빈처’나 ‘운수 좋은 날’에 혹시 이와 비슷한 장면이 나오던가? 어쨌든 이것이 백수로서 겪는 두 번째 자유롭지 못함인데, 이 둘을 일컬어 백수이우白手二愚라 한다네. 하지만 이러함에도 불구, 나는 백수 생활을 청산할 계획이 전혀 없다네. 혹 아실런지 모르겠지만 올해 중간쯤에 내가 백수 청산을 한 번 했다가 아주 곤혹스런 곤욕을 치룬 적이 있다네. 친구들, 생활 중에는 백수의 무위도식無爲徒食 생활이 최고일세. 명심하시게. 습관은 들이기 나름일세. 처음부터 쉬운 것이 어디 있겠나?"


   이렇게 백수의 도를 첨가하여 친구가 보내온 카톡의 ‘오늘은 이 시로 인사’에 답장하여 보냈사온데, 어떠합니까? 취기醉氣 미성未醒으로 운전 중에 떠올린 생각이라 하기에는 실로 놀랍지 않사옵니까?


p.s. 시인 친구에게서 금세 답장이 왔습니다. “상처喪妻한 선배를 위로해 주고 가는 길, 그 시절의 아버지를 떠올리며 한참을 소리내어 엉엉 울다가, 거기에 엄마를 향한 마음을 얹어서 쓴 시랍니다. 어쩐지 그 깊이와 내면의 상처傷處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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