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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무균 Oct 13. 2021

박종진, 만년필을 探하고 貪하다

   난해 12월 20일 사무실 인근 서점에서 책 네 권을 샀다.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유발 하라리), ‘두 사람의 역사’(헬게 헤세), ‘시는 나의 닻이다’(염무웅 등), ‘만년필 탐심’(박종진)이 그 책들이었다. 이 중에서 다른 책들은 아직 펴 보지도 않았지만(한 권의 책은 곧 읽을 것이었으나, 두 권의 책은 두꺼웠고 얕은 지식으로 읽기에 좀 두려워 언제 펼쳐질지 앞날을 예측할 수 없다. 게다가 겨우 67쪽에서 멈춘  하라리의 ‘사피엔스’가 협탁 위에 버젓이 버티고 있었다. 뭐 사실 소설가 김영하는 책은 읽으려고 사는 것이 아니라 산 책들 중에 읽는 것이라고 하기는 했다. 이 말에 난 충실한 편이다.) 박종진의 ‘만년필 탐심’만은 책을 산 다음 날 모두 읽었다. 책은 250여 쪽에 불과했고, 판형도 작았으며, 자료 사진들이 잘 버무려져 있어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한때 만년필에 아주 관심이 많았다.(지금은 아니다. 만년필은 다른 필기구에 비해 폼은 나지만 관리가 필요한 물건이고 사용하는 데 있어서도 번거롭기 짝이 없다. 때때로 청소도 해줘야 하고, 잉크도 넣어주어야 한다. 물론 만년필의 이러한 아날로그적 풍모에다 사용자의 허세가 더해져 만년필을 사용하는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왜 그런고 하니 그 한때, 회사의 대표나 임원들이 양복 안주머니에서 또는 만년필 패치에서 고가의 명품 만년필을 꺼내 결재서류에 ‘슥슥슥~’ 사인을 하는 것을 보면 무지하게 폼이 났고, 부러웠다.(그때까지 난 만년필이라고는 파이롯트와 아피스, 파커밖에 몰랐고 몽블랑은 산 이름인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기필코 나도 그래 보리라 다짐했다. 이후 몇 년간 만년필을 사 모으고, 쓸데없는 필기 연습도 하고, 결재서류에 사인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은 한때였다. 만년필은 급히 써야 할 때 잘 나오지 않았고(충전재가 수성잉크라 잘 말라 굳는다.), 주기적으로 청소를 해줘야 했고(의식을 치르듯 재미있는 일이기도 했지만 어떨 땐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할 정도로 매우 귀찮은 일이다.), 잉크가 떨어지면 새로 잉크를 넣어야 했고(잉크병에 펜촉을 넣고 카트리지에 잉크를 넣다 보면 자주 손에 잉크가 묻는데, 이 잉크 칠은 잘 지워지지도 않는다.), 펜촉Nip이 망가질까 늘 조심해야 했으며(유명한 만년필의 펜촉은 매우 고가다. 망가지면 교체비에 눈물을 흘린다.), 술이라도 한잔 마시면 잃어버릴까 고민을 해야 했다.(이런 이유로 난 이미 고가의 몽블랑과 카렌다쉐 만년필 두 자루-몽블랑은 내가 샀지만 카렌다쉐는 한 자루는 선배가, 또 한 자루는 한때 알콜을 자주 섭취했던 심포지움장에서 선물한 것이었다.-를 알콜과 함께 증발시킨 적이 있다.) 만년필은 사용하는데 있어 아주 번거롭기 짝이 없는 물건이었다


   어느 때인가부터 만년필 모두를 깨끗이 청소해 책상서랍에 모셔두고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나의 필기구는 주로 볼펜이 되었다.(볼펜은 1940년대 중반부터 상용화되어 그동안 필기구 시장을 장악했던 만년필을 넉다운 시켰다. 1938년 헝가리의 비로 라슬로 요세프의 특허가 상용화되면서 시작되었다고 알려졌으나, 실제는 1888년 미국 매사추세츠 은행가였던 존 라우드가 거친 표면에 글을 쓰기 위해 발명한 것부터 시작됐다는 것이 정설이다.-박종진 ‘만년필입니다’중에서) 볼펜은 필요로 할 때 바로 쓸 수 있고, 청소를 해주지 않아도 되었으며(글씨를 쓰다보면 일명 볼펜 똥이라 부르는 잉크 찌꺼기가 볼에 뭉쳐 방해가 되기는 한다.), 카트리지는 평생을 사용해도 남을듯했다. 누가 가져가거나 잃어버려도 그냥 소모품이라 여겨 신경쓰지 않았다.(물론, 볼펜도 유명브랜드는 몇 십만 원씩 하는데, 당연히 이런 볼펜은 함부로 다루지 않는다.) 한마디로 볼펜은 관리가 필요없는 필기구였다.


   그러던 어느 날 불현듯 책상서랍에 고이 모셔둔 만년필이 생각났다. ‘저 사용하지도 않는 만년필들은 내가 존재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아이들이 유산으로 물려받나? 사용은 하기나 하며, 관리는 제대로 할까? 혹시 잃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만년필은 저렇게 모셔둘 게 아니라 제 타고난 역할을 충실히 하게 해야 할 것들이었다. ‘그래 이제 앞으로 내가 직장생활을 하면 얼마나 더 하고, 사인할 기회는 또 얼마나 더 있겠는가? 이제부터라도 결재서류에 사인을 할 땐 싸구려 흔한 볼펜이 아니라 폼나게 만년필로 하고, 손 글씨를 써야 하는 일이 있을 때도 좀 불편이야 하겠지만 만년필을 사용하자!’ 밤늦게 책상 서랍에 있던 만년필들을 모두 꺼내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현재 가지고 있는 만년필들. 사용할 일이 거의 없고 수기로 일기를 쓸 때 가끔 볼펜 대신 한 자루씩 꺼내어 쓴다. 

   만년필 청소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은 흐르는 수돗물로 펜촉에 남아있는 잉크를 흘려보내는 일이다. 그리고 나서 수돗물(굳이 혹자들이 말하는 증류수를 사용할 필요는 없다.)을 미지근하게 받아 약식으로 분해한 만년필을 3~4시간 정도 담가 두면 된다. 보관할 때 청소를 한다고 했는데도 만년필의 필러(잉크를 채우는 통)와 피드(펜촉 아랫부분, 잉크를 펜촉 끝으로 보내는 역할을 한다.)에 말라붙어 있던 잉크가 물속으로 끊이지 않고 번져 나왔다. 물에 용해되어 나오는 잉크는 펜촉에 가까울수록 진하고 멀어질수록 색깔이 옅었다. 그것을 보면서 잉크가 번져 나오는 모습이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마치 어릴적 소나무 껍질로 만든 배 꽁무니에 추진력을 위해 바른 송진이 물을 밀어내며 퍼지는 궤적 같았다. 잉크는 시간을 두 배로 늘려놓은 것처럼 느리게 퍼져나갔다.


   다음날 새벽 일찍 일어나 세면기에 들어 있던 만년필들을 꺼내 깨끗한 휴지 위에 늘어놓았다. 틈틈이 스며든 물기를 모두 제거하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었다. 아침을 준비하며 “참 정성”이라는 아내의 칭찬을 귓등으로 흘려듣고 출근을 했다. 그리고 그날 퇴근을 하자마자 바로 물기를 말렸던 만년필들을 조립했다.(물기를 잘 말리지 않고 조립하면 만년필 안쪽의 금속 부분이 부식될 우려가 있다. 내 몽블랑 보헴 만년필 하나가 이런 경우를 당했다.) 만년필은 조립이 아주 간단하다. 필러를 끼우고, 배럴을 맞추고, 캡을 씌우면 끝이다.(간단해 보이지만 만년필은 부속품이 10여 가지나 될 정도로 꽤나 많다. 그래서 제대로 된 분해와 조립은 전문 도구가 있어야 하고, 전문가가 아니면 쉽지도 않다. 일반 사용자들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 만년필 조립이 M16 소총을 분해하고 조립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조립을 마치고 당분간 사용할 만년필을 두 자루 골라 한 자루는 잉크를 채우고 또 한 자루는 일회용 새 카트리지를 끼웠다. 그리곤 한참 동안 만년필 펜촉이 아래가 가도록 세워 놓았다. 나머지 만년필들은 다시 책상서랍 속으로 들어갔다. 이제는 만년필을 사용하는 일만 남았다. ‘슥슥슥~’ 빈 종이 위로 만년필이 부드럽게 달렸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만년필의 서걱거리는 소리가 경쾌했다. 마치 푸른 달빛 아래 고즈넉한 산길을 홀로 걷는 것 같았다.


   사실 내가 만년필에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한 권의 책 때문이었다. 한동안 독서를 게을리했다. 연말이라 모임도 잦았고 생각할 것들도 많았다. 사놓은 책들은 쌓여 갔지만 책을 펴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내용들은 이어지지 않았다. 아침이면 정신이 혼미해 어제의 기억을 소환하기에도 벅찼다. 그러던 중에 우연히 한 권의 책자를 접하게 됐다. 신문에 난 책 소개 기사를 읽고 휴대폰에 메모를 해 둔 나는 최대한 빠른 시간에 책을 사러 서점에 갔다. 하지만 서점에 이 책이 있으리라고는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 책은 발행된 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았고, 인기 작가의 책도 아니었으며, 대형 출판사에서 출간된 책 또한 아니었다. 당연히 그러한 류의 다른 책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재고가 없으리라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하지만 재고가 없으면 또 어떤가. 이 책이 시간을 다투어 읽고 리포트를 제출해야 할 책은 아니지 않은가. 없으면 예약주문을 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서점에는 딱 한 권의 재고가 있었다. 2018년 12월 14일 1쇄로 발행된 책, 다른 세 권의 책과 함께 나는 이 책을 샀다. 그리곤 다음날 오후부터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 바로 ‘만년필 탐심’이었다.


   책은 1부 ‘탐심探心-깊이 살펴보려는 마음’과 2부 ‘탐심貪心-탐하는 마음’으로 구성되어져 있었다. 말 그대로 1부 탐심은 만년필에 대한 저자의 탐구였고, 2부 탐심은 만년필에 대한 저자의 욕심이었다. 저자는 40년 가까이 만년필을 연구해 왔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만년필연구소도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 책을 쓰는 데 10년이 넘게 걸렸다고 한다.(그 집념과 인내에 경의를 표한다.) 책에는 만년필의 기원(실용적인 만년필은 1883년 워터맨에서 만들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만년필의 재료와 형태의 변화, 조약과 협정에 사용된 만년필들(특히 히틀러, 트럼프, 김정은 등이 사용한 펜들), 변하지 않는 만년필의 전설 파커51과 팰리컨 M800, 몽블랑149에 대한 이야기, 몽블랑의 시그니처인 ‘화이트 스타’의 유래, 유명 작가와 만년필, 만년필의 진화, 만년필의 가치와 고르는 법 등 만년필과 관련된 다양한 이야기들이 저자의 탐구探究와 탐심貪心으로 소개되어 있다.


   박종진의 ‘만년필 탐심’은 만년필 전문 서적이 아니다.(만약 만년필을 전문적으로 알려면 작가가 2013년 쓴 만년필 사용자를 위한 입문서 ‘만년필입니다’를 보면 된다. 난 이 책을 2017년 9월 24일 휴대폰에 메모해 두었다가 올해 1월 4일 ‘만년필 탐심’을 읽고 난 후에야 샀다. 어째 선후가 좀 뒤바뀌었다.) 이 책은 만년필뿐만 아니라 만년필에 새겨진 역사와 철학으로 인문人文의 흔적을 엿보는 책이다. 더불어 만년필을 통해 근·현대사의 한 편린片鱗을 살펴볼 수 있는 책이다. 그래서 만년필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한번 읽어볼 만하다. 직접 읽어보면 훨씬 더 재미있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 나는 이 책을 읽고 심각한 부작용을 앓게 됐다. 탐심探心이 아니라 탐심貪心이 다시 일었기 때문이다. 파커51과 팰리컨 M800이 지금 나를 치명적으로 유혹하고 있다.




※사족蛇足 : 책의 저자가 올해 1월 10일 한 일간지에 칼럼을 기고했다. 제목은 ‘개와 만년필을 다루는 법’이었다. 글의 마지막 문단을 인용하면 이렇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감당할 수 있는 개수와 아끼는 마음이다. 몇 년 전 한 초등학생이 내게 적절한 만년필 개수에 대해 물었다. 잠시 생각한 후에 “강아지 좋아하니?” 했더니 한 마리 키우고 있다고 했다. “좋아하면 열 마리 키우지?” 했더니 “그건 힘들어요.” 한다. “바로 그거야. 만년필도 주인이 감당할 수 있는 개수가 있어. 중요한 것은 몇 천 원짜리라도 아끼는 마음을 갖고 매일 써주는 거야. 그렇게 길이 나서 좋아진 필기감을 너 자신에게 선사하는 것이 만년필을 사용하는 진정한 즐거움이란다.” 결국 명기와 명견을 만드는 것은 값과 혈통이 아니라 주인이다.」 내겐 증발하고 남은 만년필이 아직 열 자루가 있다. 최근 다시 만년필을 사용하기 시작했지만 기껏 사용하는 것은 한 두 자루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다시 탐심貪心이 일고 있다. 허세虛勢다.


※이 글은 2019년 1월 13일 쓴 글이다. 블로그에 게재한 글을 브런치에도 함께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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