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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길이었던 길은 없습니다

by 김무균

남한산성 오르는 산길

예전 보부상들이 오르내렸다던 좁은 등산로

휴일 새벽, 바람 소리 들으며 그 길을 오릅니다.

길옆으로 물봉선화, 이름 모르는 흰 야생화가

군데군데 피어 있습니다.

콧등에 땀이 배어 나올 정도로 한참을 걷다 보면

영춘산 입구라 쓰인 팻말, ‘웃논골’ 못 미쳐서

두 갈래 길을 만나게 됩니다.

한 길은 오래전부터 있었던 길이고

한 길은 최근에 생긴 새 길입니다.

처음 새 길은 발을 디딜 만큼만, 좁았고

이어지지도 않아서 길이 될까 싶었습니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계절이 바뀌면서

새 길은 차츰 길이 되어갔습니다.

처음에는 발을 내딛는데 머뭇거리던 사람들도

길이 형태를 잡아가자 발 내딛기를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새 길은 더 넓어졌고, 이어져서

이제는 본래 있었던 길만큼 단단해졌습니다.

남한산성 오르는 등산로. 왼쪽 길이 원래부터 있던 길이고, 오른쪽 길은 새로 생긴 길이다.

남한산성 가는 길 영춘산 입구, 웃논골 못 미쳐 두 갈래 길

휴일 새벽, 그 길을 걸으면서 생각합니다.

원래부터 길이었던 길은 없었다고.

이 길도 원래는 뱀, 개구리, 들쥐, 토끼, 오소리, 족제비가

사람 몰래 제 몸을 감추고

이곳과 저곳을 옮겨 다니던 잡초 무성한 곳이었을 것이라고.

하지만 사람들이 다니기 시작하면서 길이 되었을 것이라고.

처음에는 거친 잡초가 발목을 잡고, 키 낮은 관목이 앞을 막아

한 발 내딛기도 힘들었을 것이라고.

하지만 이슬이 모여 바다를 이루듯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좁고, 이어지지 않고, 울퉁불퉁했던 곳이

넓어지고, 이어지고, 편편하고 단단해져서 길이 되었을 것이라고.

처음부터 길이었던 길은 없을 것이라고.(2024.10)


※작가노트

2016년 남한산성 아랫동네로 이사를 왔습니다. 등산을 하기에 천혜의 환경이었습니다. 자주 남한산성을 올랐습니다. 처음 산을 오를 때는 등산로가 좁고 거칠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남한산성 아랫마을로 더 많이 옮겨오면서 등산로는 넓어졌고, 단단해졌고, 불편을 못 참는 습성으로 새로운 길이 만들어졌습니다. 반면에 스스로 그래야 할 자연의 본성은 줄어들었습니다. 새로운 길을 없애야 하는지, 무엇이 더 정의롭고, 옳은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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