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의 쏨은 쏘지 않는 것이다

‘명인전’, ‘나카지마 아쓰시’

by 김무균

조(趙)나라 한단(邯鄲)에 사는 기창(纪昌)은 천하제일 궁술의 명인이 되겠다는 뜻을 세웠다. 그래서 당금 궁술의 명인 비위(飛衛)를 찾아가 궁술을 배우고자 했다. 그러나 비위는 아직 궁술을 배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니 눈깜빡이지 않는 것부터 익히고 나서 궁술을 배우러 오라 했다.


기창은 2년간 아내의 베틀 아래서 눈깜빡이지 않는 수련을 했다. 이에 속눈썹과 겉눈썹 사이에 작은 거미가 줄을 치기에 이르렀다. 비위를 찾아가 다시 궁술 배우기를 청하니 비위는 아직 이르다며 작은 것이 크게, 희미한 것이 또렷하게 보이게 될 때까지 보기를 익히라 했다.


3년의 세월이 흐르니 드디어 남향 창에 걸어놓은 유문류 최양성 소절족동물(有吻類 催痒性 小節足動物-‘이’를 일컬음)이 말처럼 크게 보였다. 그제야 기창은 비위에게 궁술을 배우게 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더 이상 스승에게 배울 것이 없어졌다. 이에 비위가 서쪽 험한 태항산을 지나 곽산(霍山) 꼭대기에 가면 감승노사(甘蠅老師)라는 고금에 따를 자가 없는 궁술의 대가가 있을 것이라 알려주었다.


한 달 후 기창은 곽산의 정상에서 양같이 온화한 눈의, 그러나 매우 늙어 기운 없어 보이는, 백 살도 넘은 듯 한 노인을 만났다. 기창은 그의 궁술을 과시했으나, 노인 앞에서 그의 궁술은 어린아이 손짓에 지나지 않는 것을 느꼈다. 9년간 기창은 감승노사 밑에서 지냈다. 그 기간 동안 그가 배운 것은 아마 노인의 사지사(射之射-화살을 쏘아 표적을 쓰러뜨리는 것)를 넘은 불사지사(不射之射-화살을 쏘지 않고 표적을 쓰러뜨리는 것)를 배우는 것이었다.


9년이 지나 산에서 내려오니 사람들은 기창의 생김새가 달라진 것을 보고 놀랐다. 예전의 지기 싫어하던 사나운 얼굴은 보이지 않고, 아무 표정도 없이 목우(木偶-나무인형)처럼 바보같이 바뀌어 있었다. 오랜만에 기창은 옛 스승 비위를 방문했다. 비위는 기창의 얼굴을 보고 감탄하며, “천하의 명인이다. 나 같은 것은 발끝에도 이르지 못한다.”라고 했다.


그의 궁술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는 컸다. 하지만 기창은 그들의 요구에 부응하지 않았고, 활조차 손에 잡지 않았다. 누군가 그 이유를 묻자 기창은 “최상의 행위는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요(至爲無爲), 최상의 말은 말을 하지 않는 것이며(至言去言), 최상의 쏨은 쏘지 않는 것이다(至射無射)”라고 했다.


기창이 세상을 떠나기 한 두 해전 지인의 집에 초청되어 간 적이 있었다. 그 집에 하나의 도구가 있었는데, 기창이 본 적이 있는 것은 확실한데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주인에게 물었다. 주인은 손님이 농담을 한다고 생각해 빙긋이 웃었다. 늙은 기창이 다시 물었다. “저것이 무엇이라 부르는 물건이고, 또 무엇에 사용하는 것인가?” 그래도 주인은 애매한 웃음을 띠고 기창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세 번째 기창이 진지한 얼굴로 같은 질문을 했다. 비로소 주인은 경악했다. “아아, 당신이, 고금무쌍(古今無雙) 궁술의 명인인 당신이 활을 잊어버렸단 말인가. 아아, 활이라는 이름도, 사용법도!” 그 후 한단에서는 한동안 화가는 붓을 감추고, 악사는 거문고 줄을 끊고, 목수는 잣대를 손에 드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감승 스승의 밑을 떠난 지 40년. 기창은 조용히, 실로 연기처럼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40년간 그는 결코 사(射)를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입에 올리지 않았을 정도이니, 활과 화살을 든 활동이 있을 리 없었다.


◈사족(蛇足) : 일본 소학교 교과서에 그의 소설 ‘산월기’와 ‘이릉’이 지금까지도 실리고 있고, ‘아쿠다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에 버금가는 천재소설가였으나, 33세에 요절하고만 ‘나카지마 아쓰시’. 그는 일제강점기 경성(서울)에서 용산소학교와 경성중학교를 다녔다. 이를 토대로 식민지 조선을 배경으로 한 몇 편의 단편을 쓰기도 했다.


그의 단편소설집 ‘산월기’ ‘이릉’편에 보면 대장군 이광의 손자인 이릉이 한무제에게 청해 흉노를 정벌하러 오천의 군사를 이끌고 나간다. 하지만 전쟁에 패하고 문책을 두려워한 상관의 비협조로 그의 군사는 초반에는 성공적으로 흉노를 물리쳤으나 귀로에 중과부적, 8만 흉노군에게 결국 몰살당하고 만다. 이 과정에 이릉 또한 전투 중 혼절하여 포로가 되어 항복한다. ‘도절시진(刀折矢盡)’은 여기서 나오는 말이다. 칼을 부러지고 화살은 다해 어떻게 해볼 수가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한나라에서 이릉에게 남은 건 항복이라는 선택밖에 없었다. 한무제에게 아첨하는 무리들의 참소로 인해 한에 남아있던 이릉의 가족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고, 흉노 속에서 기회를 보아 선우를 살해하고 한나라로 돌아오려던 그의 꿈 또한 속절없게 된다. 이 과정 속에서 사마천이 이릉을 옹호하다 궁형을 당하고 사기를 쓴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하다.


※작가노트

이 글은 ‘나카지마 아쓰시(中島敦)’의 ‘산월기’에 나오는 열한 장 짜리(국배판) 단편 ‘명인전’을 읽고, A4지 한 장으로 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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