찜질방에서 ‘희망’을 생각하다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어떠한 고통도 견딜 수 있다.

by 김무균

신장(腎臟)이 제 역할을 못하는지 자고 일어나면 얼굴이 퉁퉁 부었다. 저녁때 짜고 매운 음식을 자주 먹어서 그런가, 해서 본능의 욕구를 참으며 의도적으로 식탐을 줄이려 노력했지만 그게 또 자주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 땀을 빼면 얼굴의 부기가 좀 빠지지 않을까 하고 찜질방을 생각하게 되었다. 찜질방은 참을 인(忍)자와 약간의 끈기만으로 가능할 것 같았고, 사지(四肢)를 움직이는 육신의 수고 없이 땀을 빼는데 최상의 장소라는 생각이었다. 또 나는 고통을 즐거움으로 인지하도록 뇌신경을 조작하는데 다소 소질이 있는 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마조히스트(masochist)라는 말은 아니다.


과도한 숙취로 호빵처럼 얼굴이 부어 오른 어느 날, 어제의 취기를 육신의 수고로움 없이 몰아내려 혼자 찜질방을 찾았다. 몇 달 전 구매해 놓은 찜질방 출입 쿠폰(순전히 할인 가격 때문에 구매해 놓은 쿠폰이었다. 찜질방이야 언제라도 가고오지 않겠는가.)을 내고, 찜질방 안에서 아담과 하와의 원죄를 짓지 않도록 배려해 주는 옷값으로 천 원을 지불하니 입장이 허락됐다. 찜질방 안은 남(男)과 여(女), 노(老)와 소(少)가 대동(大同)하고 있었는데, 방안은 또 게르마늄 황토방, 정통 소금방(정통은 무슨 뜻인지?), 칠보석 찜질방(나노 탄소 숯불 원적외선이라고 쓰여 있는데 무슨 뜻인지 통 모르겠다. 칠보석은 또 뭔가?), 냉방 등으로 나눠져 있었다. 이중 가장 뜨거운 방은 칠보석 방이었다. 한꺼번에 쫙~ 빗물이 떨어지듯 그렇게 땀은 흘러야 했다. 그래서 가장 뜨거운 곳, 칠보석이란 이름표가 문틀 위에 걸린 찜질방으로 들어섰다. 문을 열자 훅~ 하고 뜨거운 열기가 코와 입과 눈으로 예고도 없이 밀려들었다. 수건으로 얼굴을 막아 한꺼번에 코와 입과 눈을 방어해 열기를 막았으나, 온몸으로 파고드는 열기는 송곳처럼 날카로워 아렸다. 실눈을 살짝 뜨고 온도계를 보니 76이라는 숫자가 보였다. 76도 이거 살이 익는 건 아닌가. 우리의 영원한 우상 브룩쉴즈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 ‘사하라’의 사막을 떠올리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편백나무판자로 된 바닥도 뜨겁기는 마찬가지여서 앞꿈치와 발가락만 사용해 살짝살짝 걸었다. 방안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가부좌를 트니 발바닥보다 감각이 더 예민한 허벅지와 종아리가 깜짝 놀란다. 목에 둘렀던 수건을 얼른 바닥에 깔고 그 위에 다시 앉고는, 소리 없이 사라지는 시간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모래시계를 가져다 발아래 뒤집어 놓았다.(직접 눈으로 줄어드는 고통의 양을 볼 수 있어야 더 오래 견딜 수 있는 것이 사람이다.) 이제부터는 시간과의 싸움이 시작될 터였다.


이내 땀구멍이 크게 열리면서 어제 마신 혼미한 취기와 떨어지지 않는 숙취를 멀리 보내기 위해 아침에 마신 냉수가 내 몸을 미라로 만들 작정인 듯 쏟아져 내렸다. ‘그래 찜질방은 모름지기 이래야지’하면서도 스타카토로 턱 턱 막히는 숨에 눈은 소리 없는 모래시계에 고정되어 어서 빨리 고난의 양에 비례하는 모래가 작은 틈을 뚫고 아래로 내려가기를 바랐다. 하지만 고통의 시간은 원래 더딘 법이라 좀체 내 바람을 충족시켜주지 못했다. 이러다 죽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열기에 말라죽을 때쯤 되면 내 머리보다 내 발이 먼저 내 자유 의지로 열 수 있는 저 찜질방의 문을 열고 나갈 것이니 나는 죽을 일이 없을 터였다. 죽을 것 같은데도 내가 여기서 버틸 수 있는 것은 단지 그것 때문이었다. 땀으로 세수를 하며 초열지옥(焦熱地獄)같은 방 안에서 고통을 즐기다 갑자기 어쩌면 일어날 수도 있는 일, ‘내가 내 자유 의지로 저 문을 열고 나갈 수 없다면, 나는 여기서 저 모래시계만큼의 시간을 버틸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아마 나는 미쳐버리리라. 이 상황에서 나는 5분을 버티고, 10분도 버틸 수 있다. 하지만 몇 걸음 앞에 있는 저 문을 내 자유 의지로 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단 몇 초도 버티지 못하고 살려달라고 발로 벽을 차고, 어깨로 밀치고, 손으로 열리지 않는 문을 두드리며 고함을 지를 것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소소한 일상에서 깨달음이 왔다. 똥바가지에도 불성(佛性)이 있음에 찜질방 안에 불성이 없을 리 없다. 원효가 동굴 속 해골바가지 물을 마시고 깨친 바도 이랬으리라.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고통은 견딜 수 있고, 나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모든 것은 부처의 고해(苦海)요, 예수의 광야(廣野)가 되는 것이다.


시인 정호승은 “희망에는 희망이 없다./나는 절망을 통하여 희망을 가졌을 뿐/희망을 통하여 희망을 가져본 적이 없다.”고 그의 시집‘나는 희망을 거절한다’에서 이야기했다. 하지만 희망이 있는 한 살아가는 것이 사람이고, 희망이 있어야만 희망할 수 있다. 찜질방 안에서 자유 의지로 열 수 있는 문은 내게 희망이었다. 그래서 나는 찜질방 안 76도의 열기 속에서도 미치지 않고 고통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이다. 리더십 전문가 존 맥스웰의 ‘매일 읽는 맥스웰 리더십’에 이런 글이 나온다(물론, 632쪽이나 되는 이 책을 내가 읽었다는 말은 아니다). “사람은 음식 없이는 40일을, 물 없이는 4일을, 공기 없이는 4분을 생존할 수 있다. 그러나 희망이 없으면 단 4초도 살 수 없다.” 희망은 우리에게 힘든 시간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을 주고, 우리를 흥분과 기대감으로 부풀게 한다.


찜질방을 나오니 서쪽 하늘에 작고 하얀 아미 하나가 그려져 있었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 몸속에 남은 열기를 식혀 주었다. 나는 두 팔을 쭉~ 뻗어 하늘을 향해 올렸다. 얼굴의 부기를 빼기 위해 찜질방을 다녀온 어느 저녁 날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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