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秋史, 金正喜. 1786~1856)가 헌종(憲宗)* 시절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 대정현으로 귀양 가 9년(1840~1848)이란 긴 시간 동안 위리안치(圍籬安置, 집 주위에 가시울타리를 두르고 그 안에서만 살게 하는 유배. 다산茶山이 강진에 주군안치州郡安置 되어 고을 안에서 자유롭게 왕래 할 수 있었던 것에 비하면 가혹한 형벌이었다.) 되어 있을 때,(추사는 이후에도 영의정 권돈인의 예송논쟁 일에 연루되어 1851~1853년까지 함경도 북청으로 2년간 유배 되었다.) 제자 이상적*이 스승에게 수시로 책을 보내주었다. 한번은 중국에 다녀온 이상적이 하장령賀長齡이 편찬한 ‘황청경세문편皇淸經世文編’ 120권을 보내주었는데(한 해 전인 1843년에도 이상적은 추사에게 북경에서 구한 계복桂馥의 ‘만학집晩學集’ 8권과 운경惲敬의 ‘대운산방문고大雲山房文藁’ 6권 2책을 보내 준 적이 있다.), 이에 감격한 추사가 그림 하나를 그려 이상적에게 보내주었다. 소동파(蘇東坡, 北宋, 1037~1101)가 혜주로 유배되었을 때 그를 위로하기 위해 어린 아들이 먼 곳을 찾아왔다. 동파는 너무 기뻐 언송도偃松圖 한 폭을 그리고, 아들을 칭찬하는 글을 썼다. 그림은 남아있지 않았지만 글씨는 남아 옹방강(翁方綱, 淸, 1733~1818)이 소장하고 있었다. 연경에 갔을 때 옹방강의 서재를 방문했던 추사는 이 글을 본 적이 있었다. 이상적이 어렵게 구해 보내준 책을 받고 추사는 소동파를 생각했을까? 추사는 창문 하나 있는 조그만 집 하나, 그 집에 비스듬히 기대어 세한을 견디는 송백 몇 그루를 그려 ‘세한도歲寒圖’라 화제畵題하고, 우선시상완당(藕船是賞阮堂, 우선-우선은 이상적의 호다-은 감상하시게, 완당)이라 낙관한 후 아래에 인장으로 장무상망(長毋相忘,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을 찍었다. 1844년의 일이다. 아래는 추사의 세한도 발문跋文이다. 짧지않지만 그 뜻을 살피기 위해 굳이 모두 옮겼다.
「지난해에 ‘만학집’과 ‘대운산방집’ 두 책을 부쳐주었고, 금년에 또 우경(藕畊 하장령, 淸, 1785~1848)이 지은 ‘황청경세문편’을 부쳐주었다. 이들 책은 모두 세상에서 언제나 구할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천만리 먼 곳에서 구입한 것이고, 여러 해를 거듭하여 입수한 것이지 한 때에 해낸 일이 아니다. 그리고 세상의 도도한 풍조는 오로지 권세가와 재력가만을 붙좇는 것이다. 이들 책을 구하려고 이와 같이 마음을 쓰고 힘을 소비하였는데, 이것을 권세가와 재력가들에게 가져다주지 않고 도리어 바다 건너 외딴섬에서 초췌하게 귀양살이 하고 있는 나에게 마치 세인들이 권세가와 재력가에게 붙좇듯이 안겨주었다. 태사공(사마천司馬遷)*이 “권세나 이익 때문에 사귄 경우에는 권세나 이익이 바닥나면 그 교제가 멀어지는 법이다”하였다. 그대 역시 세속의 거센 풍조 속에서 살아가는 한 인간이다. 그런데 어찌 그대는 권세가와 재력가를 붙좇는 세속의 도도한 풍조로부터 초연히 벗어나, 권세나 재력을 잣대로 삼아 나를 대하지 않는단 말인가? 태사공의 말이 틀렸는가? 공자께서, “일 년 중에서 가장 추운 시절이 된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그대로 푸름을 간직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하셨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사철을 통해 늘 잎이 지지 않는다. 엄동이 되기 이전에도 똑같은 송백이요, 엄동이 된 이후에도 변함없는 소나무요, 잣나무다. 그런데 성인께서는 유달리 엄동이 된 이후에 그것을 칭찬하셨다. 지금 그대가 나를 대하는 것을 보면, 내가 곤경을 겪기 전에 더 잘 대해 주지도 않았고 곤경에 처한 후에 더 소홀히 대해주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의 곤경 이전의 그대는 칭찬할 만한 것이 없겠지만, 나의 곤경 이후의 그대는 역시 성인으로부터 칭찬을 들을 만하지 않겠는가? 성인께서 특별히 칭찬하신 것은 단지 엄동을 겪고도 꿋꿋이 푸르름을 지키는 송백의 곧은 절조와 굳센 절개 때문만이 아니라, 성인께서도 역시 추운 날씨에 마음속에 느끼신 바가 있었던 것이다. 아! 전한(前漢, 西漢이라고도 함. B.C 202~A.D 220)의 순박한 시대에 급암(汲黯, 미상~B.C 112, 전한 무제 때 인물)과 정당시(鄭當時, 전한 중기의 관료) 같이 훌륭한 사람들의 경우도 그 빈객들이 그들의 부침浮沈에 따라 붙좇고 돌아섰다. 그러고 보면 하규(비) 땅의 적공(翟公, 전한 중기의 관료)이 대문에 방榜을 써 붙여 염량세태(炎凉世態, 뜨거웠다가 차가워지는 세태라는 뜻으로, 권세가 있을 때에는 아첨하여 좇고 권세가 떨어지면 푸대접하는 세속의 형편)를 풍자한 처사 따위는 박절한 인심의 극치라 하겠다. 슬프다!」(김동석 선생의 번역 글을 옮김. 괄호 안은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去年以晩學大雲二書寄來 今年又以藕耕文編寄來 此皆非世之常有 購之千萬里之遠 積有年而得之. 非一時之事也 且世之滔滔 惟權利之是趍 爲之費心費力如此 而不以歸之權利 乃歸之海外蕉萃枯槁之人 如世之趨權利者. 太史公云 以權利合者 權利盡而交疏 君亦世之滔滔中一人 其有超然自拔於滔滔 權利之外不以權利視我耶 太史公之言非耶. 孔子曰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 松栢是毋四時而不凋者 歲寒以前一松栢也 歲寒以後一松栢也 聖人特稱之於歲寒之後 今君之於我. 無可焉 由後而無損焉 然由前之君 無可稱 由後之君 亦可見稱於聖人也耶 聖人之特稱 非徒爲後凋之貞操勁節而已. 亦有所感發於歲寒之時者也 烏乎 西京淳厚之世 以汲鄭之賢 賓客與之盛衰 如下邳榜門 迫切之極矣 悲夫.」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子曰 歲寒, 然後知松柏之後凋也). 논어 자한편子罕編에 나오는 말이다. “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르름을 알게 된다.”는 뜻이다. 세한歲寒은 24절기의 소한小寒과 대한大寒을 말한다. 송백지후조松柏之後凋의 조凋는 원래 논어 원문에는 조彫로 나온다. 새긴다는 뜻이 시든다는 의미로 쓰였다. 2012년 글항아리에서 출간한 '논어' 176~177페이지에 나온다.
※蛇足 : 스승 추사로부터 뜻밖의 ‘세한도’ 한 폭을 선물 받은 이상적은 너무나 기뻤다. 연경으로 떠나려던 참에 ‘세한도’를 받은 그는 몹시 감격하여 추사에게 깊은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삼가 ‘세한도’ 한 폭을 받아 읽으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어찌 이런 분에 넘치는 칭찬을 하셔서 감개가 절절했습니다. 아, 제가 어떤 사람이기에 권세나 이익을 좇지 않고 스스로 초연히 세상의 풍조를 벗어났겠습니까? 다만 보잘 것 없는 제 마음이 스스로 그만 둘 수 없어 그런 것입니다. 더욱이 이런 책은 마치 문신을 새긴 야만인이 선비들의 장보관(章甫冠, 선비들이 쓰던 관. 중국 은殷 나라 때부터 쓰던 관의 하나인데, 공자가 이 관을 썼으므로 후세에 유생들이 많이 썼음)을 쓴 것 같아서 변덕이 죽끓듯 하는 정치판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적합하지 않으므로 저절로 청량세계에 있는 사람에게 돌아가기 마련입니다. 어찌 다른 의도가 있겠습니까? 이번에 이 그림을 가지고 연경에 들어가서 장황(粧䌙/裝潢, 비단이나 두꺼운 종이를 발라서 책이나 화첩, 족자 따위를 꾸미어 만듦)을 한 다음 친구들에게 구경시키고 제영(題詠, 제題를 내어서 시를 짓는 것)을 부탁할까 합니다. 다만 걱정스러운 것은 그림을 구경한 사람들이 제가 정말로 속물에서 벗어나 권세와 이권 밖에서 초연하다고 생각할까 하는 것입니다. 어찌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당치 않은 일입니다.”(박철상 지음, 세한도, 문학동네, 2010, 183~184P를 김동석님이 인용한 것을 재인용 함. 괄호 안은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이상적은 그해 10월 ‘세한도’를 가지고 동지사 이정응(李晸應, 1814~1848) 일행을 수행하여 연경에 갔다. 그리고 이듬해(1845년) 정월 24일 그의 벗인 오찬吳贊의 정원에서 벌어진 잔치(8년 전인 1837년 3월 이상적이 오찬의 처남 장요손張曜孫과 시와 술로 만난 적이 있었는데, 이 잔치는 그 재회의 환영연으로 베풀어진 것이다.)에 초대받았다. 이 잔치에는 주인 오찬, 주빈 이상적 외에 장요손 등 17명이 참석했다. 이상적이 추사의 ‘세한도’를 좌객들에게 펼쳐보이자 모두 격찬하며, 다투어 시로, 문장으로 제題*와 찬贊*을 붙였다. 이것이 세한도에 붙어 있는 ‘청유16가(淸儒十六家)의 제찬’이다. 이렇게 청나라 학자 16인의 제찬을 받은 이상적은 이를 한 권의 횡축으로 만들고 장목(張穆, 淸, 지리학자, 시인, 서법가. 1808~1849)의 글씨로 표지 제목을 달아 표구를 완성해 돌아왔다.(유홍준의 ‘산숭해심’ 중 ‘세한도를 그리며’에서 발췌. 원래 ‘세한도’는 가로 69.2cm, 세로 23cm였지만 청나라와 국내 문인 20명이 쓴 감상문이 덧붙으면서 길이가 15m에 달하게 됐다. 두루마리 총 크기는 가로 1,469.5cm, 세로 33.5cm이다. 이러한 ‘세한도’의 가치를 전문가들은 100억 원이 넘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무가지보無價之寶인 ‘세한도’의 가치를 어찌 돈으로 따지랴.)
귀국 후 이상적은 장대한 시화축으로 장정한 것을 보고 삼아 자랑 삼아 추사에게 보여주었다. 세한도 장축은 이상적 사후 그의 제자였던 매은梅隱 김병선金秉善에게 넘어가 그의 아들 소매小梅 김준학金準學이 이 시를 읽으며 공부했던 감상기를 두루마리 끝에 적어놓았다. 그 뒤 세한도는 휘문고등학교 설립자 민영휘閔泳徽의 소유가 되었다가 그의 아들 민규식閔奎植이 매물로 내놓아 추사 연구가인 일본인 후지쓰카*의 손에 들어갔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소전素荃 손재형孫在馨이 후지쓰카를 찾아가(손재형은 후지쓰카가 ‘세한도’를 일본으로 가지고 들어갈까 무척 걱정했다.) “원하는 대로 다 해드리겠으니 ‘세한도’를 양도해주십사”하고 부탁했다. 하지만 후지쓰카는 자신도 추사를 존경하니 이를 고이 간직하겠노라며 거절했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달하자 후지쓰카는 경성제대를 정년하고 ‘세한도’는 물론, 추사와 관계된 서화, 전적 모두를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소전은 나라의 보물이 일본으로 넘어가 버린 것을 몹시 안타까워하다가 일본 후지쓰카의 집으로 직접 찾아가 막무가내로 후지쓰카에에 ‘세한도’를 넘겨달라고 졸랐다. 후지쓰카는 단호히 거절했다. 소전은 뜻을 굽히지 않고 매일 후지쓰카를 찾아가 졸랐다. 소전의 열정에 굴복한 후지쓰카는 “맏아들 아키나오에게 자신이 죽으면 ‘세한도’를 소전에게 넘겨주라고 당부했으니 안심하고 조선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하지만 소전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바로 양도해 준다는 말만 기다리며 묵묵히 후지쓰카의 입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후지쓰카는 ‘세한도’를 간직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바로 소전이라며 아키나오를 불러 ‘세한도’를 소전에게 건네줄 것을 명했다. 그는 선비가 아끼던 것을 값으로 따질 수 없으니 어떤 보상도 받지 않겠다며 잘 보존만 해달라고 했다. 그리하여 소전은 마침내 ‘세한도’를 가지고 서울로 돌아왔다.(유홍준의 '산숭해심' 6장 세한도를 그리며 중에서 발췌) 1944년 12월의 일이다.
그러나 훗날 소전 손재형이 국회의원 선거 출마로 자금에 쪼들리면서 그의 수장품 중 겸재의 ‘인왕제색도’와 ‘금강전도’는 삼성물산 이병철 사장에게, ‘세한도’는 사채업자에게 저당 잡히고 말았다. 소전은 끝내 돈을 갚지 못해 소유권을 잃었다. ‘세한도’는 이후 미술품 수장가인 손세기 선생에게 넘어갔고, 그의 아들 손창근 선생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탁했다가 2020년 9월 박물관에 기증했다.(손창근 선생은 2008년 국립중앙박물관에 연구기금 1억 원을 기부했고, 2012년엔 경기도 용인에 있는 시가 1,000억 원 상당의 산림 200만 평을 산림청에 기부했다. 2017년에도 KAIST에 50억 원 상당의 건물과 현금 1억 원을 기부했다. 그리고 2018년엔 추사의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 등 서화 304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세한도’는 마지막 남은 그의 소장품이었다. 부친 손세기 선생 또한 1974년 서강대에 보물 1624호인 ‘양사언필초서’ 등 고서화 200점을 기증한 바 있다. 손세기 선생과 손창근 선생은 대를 잇는 기부로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실체를 우리사회에 보여주었다.) 이러한 공로로 손창근 선생은 ‘2020 문화유산 보호 유공자 포상’에서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2020년 12월 9일 청와대로 선생을 초청한 대통령은 “우리사회에 큰 울림을 주셨다”며 선생에게 90도로 인사했다.
2020년 연말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세한도를 주제로 ‘한겨울 지나 봄 오듯-세한歲寒·평안平安’특별전이 열렸다. 나는 가서 보지 못하고 컴퓨터 모니터로 세한도를 감상하며 그 아쉬움을 달랬다.
*헌종(憲宗) : 조선 제24대 왕, 휘諱는 환奐, 1827~1849, 8세인 1834년 즉위해 1849년까지 재위했다.
*이상적(李尙迪) : 조선 말기의 서화가, 문인, 자는 혜길(惠吉), 호는 우선(藕船), 벼슬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정 2품)에 이르렀고 청나라에 12회나 드나들었다.
*사마천(司馬遷) : B.C 145?~B.C 86?, 前漢, 史記를 썼다.
*제(題) : 서적, 비석, 서화 등에 적은 글로 앞의 것을 제(題)라 하고 뒤의 것을 발(跋)이라 한다.
*찬(贊) : 인물이나 서화를 찬미하는 문체. 서화에 글제로 쓰는 시(詩), 가(歌), 문(文)을 총칭하는 찬(讚) 같이 쓴다.
*후지쓰카 지카시(藤塚鄰) : 일본의 한학자. 1879~1948. 청조(淸朝)의 경학(經學)에 밝아 고증학으로서의 경학을 재평가 했다. 조선시대 김정희, 청조의 완원(阮元), 옹방강(翁方綱)의 학문적 맥락도 추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