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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무균 Oct 07. 2024

처음부터 길이었던 길은 없습니다

한산성 오르는 산길

예전 보부상들이 오르내렸다던 좁은 등산로

휴일 새벽, 바람 소리 들으며 그 길을 오릅니다.

길옆으로 물봉선화, 이름 모르는 흰 야생화가

군데군데 피어 있습니다.

콧등에 땀이 배어 나올 정도로 한참을 걷다 보면

영춘산 입구라 쓰인 팻말, ‘웃논골’ 못 미쳐서

두 갈래 길을 만나게 됩니다.

한 길은 오래전부터 있었던 길이고

한 길은 최근에 생긴 새 길입니다.

처음 새 길은 발을 디딜 만큼만 좁았고

이어지지도 않아서 길이 될까 싶었습니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계절이 바뀌면서

새 길은 차츰 길이 되어갔습니다.

처음에는 발을 내딛는데 머뭇거리던 사람들도

길이 형태를 잡아가자 발 내딛기를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새 길은 더 넓어졌고, 이어져서

이제는 본래 있었던 길만큼 단단해졌습니다.

남한산성 가는 길 영춘산 입구, 웃논골 못미쳐 두 갈래 길

휴일 새벽, 그 길을 걸으면서 생각합니다.

원래부터 길이었던 길은 없었다고.

이 길도 원래는 뱀, 개구리, 들쥐, 토끼, 오소리, 족제비가

사람 몰래 제 몸을 감추고

이곳과 저곳을 옮겨 다니던 잡초 무성한 곳이었을 것이라고.

하지만 사람들이 다니기 시작하면서 길이 되었을 것이라고.

처음에는 거친 잡초가 발목을 잡고, 키 낮은 관목이 앞을 막아

한 발 내딛기도 힘들었을 것이라고.

하지만 이슬이 모여 바다를 이루듯露積成海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좁고, 이어지지 않고, 울퉁불퉁했던 곳이

넓어지고, 이어지고, 편편하고 단단해져서 길이 되었을 것이라고.

처음부터 길이었던 길은 없을 것이라고.




※ P.S. 9년 전 남한산성 아래 위례로 이사를 왔습니다. 등산을 하기에 천혜의 환경이었습니다. 자주 남한산성을 올랐습니다. 처음 산을 오를 때는 등산로가 좁고 거칠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남한산성 아랫마을로 더 많이 옮겨오면서 등산로는 넓어졌고, 단단해졌고, 불편을 못 참는 습성으로 새로운 길이 만들어졌습니다. 반면에 스스로 그래야 할 자연의 본성은 줄어들었습니다. 새로운 길을 없애야 하는지, 무엇이 더 정의롭고, 옳은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사진은 글에서 말한 남한산성 가는 등산로입니다. 왼쪽 길은 원래부터 있었던 길이고, 오른 쪽 길이 새로 생긴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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