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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하 Jul 20. 2021

일상으로 복귀

집-회사-집-회사-집-회사 바쁘다 바빠 현대인의 삶

잠들어있던 다이어리를 발견했다. 책상 한편에 거의 버려지다시피 놓여있던 이 불쌍한 친구를 마지막으로 만난 게 2월이니까 근 반년이 다 되었다. 새해 다짐과 함께 써 내렸던 다이어리는 2월을 끝으로 뽀얀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2021년의 총기가 남아있던 두 달여의 빽빽한 기록은 뒤 이은 백지들과 대비되어 더욱 도드라졌다. 그럼 그렇지, 또 버려질 다이어리 산 거지. 매년 알고도 또 속는다.


변명을 하자면, 바빴다. 2021년 나 개인의 시간은 2월 이후로 모두 생략되었다. 다짐했던 많은 일들이 아직 운도 못 뗀 채 남아있다. 단언컨대 회사 생활 때문이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뭔가를 한다는 건 참 쉽지가 않다. 심지어 2월부터는 야근 일색이었다. 집-회사-집-회사 이렇게 다섯 번 반복하면 주말이 되었고 잠깐 기지개 켰다 정신 차리면 또 회사였다. 물론 게으르고 술 마시기 좋아하는 내 탓도 있다고 덧붙이겠다.


그렇게 반년의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갔고 최근에서야 맡았던 중요한 프로젝트가 일단락되었다. 덕분에 최근 몇 주는 제법 살 것 같은 시간들이 찾아왔다. 일상에 조금의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달까.




가장 큰 변화는 평일에도 빨래를 할 수 있다는 거다. 주말이면 녹초가 되어, 혹은 약간의 에너지가 생기면 바깥으로 싸돌아다니느라 빨래를 못했다. 우리 집에 수건이 15개가 있는데 수건이 모자랄 정도로.. (하루에 1개라고 하면... 크흠..) 이 별거 아닌 변화가 가져오는 영향은 결코 작지 않다. 평일에 빨래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최소한 8시 언저리에는 집에 도착할 수 있다는 건데 그 말은 거의 칼퇴에 준하는, 요즘같이 해가 긴 계절에는 날이 밝을 때 퇴근을 했다는 뜻이다. 이른 퇴근만으로도 기분이 좋은데 집에 도착하면 빨래를 하고도 시간이 남는다. 만세! 


더불어 집밥을 먹을 수 있다. 퇴근길 방앗간을 어떻게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물론 야근을 하면 지나칠 수 있다. 여유가 생긴 요즘은 집에 가는 길 마트에 들려 신선하고도 저렴한 제철 채소와 갖은 종류의 식재료를 바구니 가득 담는다. 비루한 요리실력이지만 직접 지지고 볶아 만들어 먹는 간단한 요리들이 주는 기쁨은 생각 외로 크다. 소비하는 즐거움, 직접 뭔가를 만들어내는 즐거움, 맛있게 먹는 즐거움까지 완벽한 삼위일체다. 물론 조금 귀찮지만, 약간의 수고스러움을 거치면 입도 몸도 정신 건강에도 이로운 것이다.


덕분에 집안이 깨끗해졌다.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니 애써 외면해왔던 아무 데나 널어놓은 옷가지들, 바닥에 나뒹굴던 머리카락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미뤄뒀던 화장실 청소 같은 궂은일들이 착착 정리되어가기 시작했다. 나를 돌보지 못하는 시간 동안 집도 버려져 있었던 셈이다. 집이 조금씩 정돈되어가자 공간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비로소 일상으로 복귀한 느낌이 들었다.




적어두고 보니까 좀 애처롭기도 하다. 너무 별거 아닌 것들이라서. 그런데 야근하는 직장인은 이런 기초적인 것들이 잘 안된다. 집구석이 난장판이 되어가면서 일상이 무너지고 몸이 상하고 스트레스로 병이 든다. 그래서 모든 야근하는 직장인들은 불쌍하다. 일감에, 월급에 저당 잡혀서 가장 소중한 시간들을 흘려보내야 하는 모든 직장러들. 모두 조금 더 자신을 돌보며 일상의 소소한 행복들을 만끽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퇴근만 제 때 제 때 했으면, 아무렴 내 다이어리가 2월에서 끝나는 일은 없었을 거다. 조금 더 빼곡한  활자들과 함께 풍성한 기억으로 채워졌을지 모를 일이다. 적어도 3월에서 7월까지 두줄로 찍찍 긋고 '바빴다'라고 쓸 일까지는 없었을 거다. 조금은 억울하다고.




뭐 넋두리는 여기까지. 우선은 찾아온 안식의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해본다. 언제 또 일감이 폭풍처럼 몰려올지 모르니, 새해 계획이 뭐였는지 다시 한번 점검해보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일단 집에 가서 요리를 해 먹고, 빨래를 돌리고, 나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일들을 차곡차곡 쌓아나가야지. 그리고 앞으로 이 여유를 유지하는 방법을 생각해봐야겠다. '늦게 까지 일 안 하기' 라거나 '빨리 퇴근하기'라거나... '야근 안 하기'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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