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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하 Nov 25. 2020

당신은 호구입니까?

나 정도면 깍쟁이 아니었나..?

실검에 호구 성향 테스트가 올라왔다.


- 호구 테스트? 이건 또 뭐지


최근 들어 성격 테스트 계열의 홍보 링크가 유행이다. 새로운 유형의 테스트가 나오면 도대체 누가 먼저 알고 검색을 이렇게 많이 한 건지 떡 하니 실시간 검색 순위에 올라있곤 한다. MBTI로 시작된 자기 성향 찾기 열풍을 타고 자신과 가장 유사한 특징을 지닌 꽃, 직업, 정치인, 아이돌에 이르기까지 듣도 보도 못한 테스트가 우후죽순 쏟아진다 했는데... 특이점이 온 걸까, 이제 호구 테스트라니. 흔한 홍보성 링크, 싱거운 분석 결과라는 것을 알면서도 검색어에 손이 갔다.



테스트 결과,

 없이 맑은 A++ 등급의 특급 호구



결과가 생각보다(?) 싱겁지는 않았다. 응 그랬구나, 나 A++급 호구...

돌이켜보면 나에게 호구 기질이 없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렇지만 이제는 정말 깍쟁이 다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호구의 행적 1 : 터미널에서 항시 대기하는 잃어버리기 장인들


하나 같이 선량하신 모습으로 차비를 빌려가셨던 잃어버리기 만렙 고수 분들..  밥은 잘 먹고 다니시죠?

고속 터미널에 가면 지갑과 휴대폰을 함께 잃어버려서 오도 가도 못하는 분들이 그렇게나 많다. 이제 갓 대학생이 된 코 묻은 나의 돈을 빌려가실 정도면 얼마나 사정이 딱하신 건가 싶어 측은지심으로 차비를 내어주길 수 차례. 차비만 빌려주시면 이 은혜를 잊지 않겠다며 계좌번호까지 꼼꼼히 적어서 떠난 님은 연락 한 번이 없었고.. 아마 적어간 계좌 번호마저 잃어버리신 것으로 추정된다. (아니면 양심이라던가) 다행히 이런 종류의 호구 짓은 대학교 1학년 이후로는 그만뒀다.



호구의 행적 2 : 길을 못 찾겠다더니.. 그녀가 찾던 길은 사이비로 가는 길


근처에 위치한 마트를 찾아 헤매던 그녀가 안쓰러워 직접 마트 앞까지 바래다주던 길, 가까운 곳이라 손짓 발짓을 섞어가며 자세히 설명해 줬는데도 잘 모르겠다길래, 아 이분 나랑 같은 과구나(길치시군요 반가워요) 싶어서 동행하기로 했다. '기운이 좋아 보이세요. 이런 말씀 자주 들으시죠?'로 시작된 운을 뗀 그녀는 내 어깨 위로 앞 길을 막는 조상님의 원혼이 보인다며 제를 올리러 가는 게 좋을 거라는 되지도 않는 소리를 시전 했고 나는 30분이 넘게 마트 앞에 서서 그녀의 제사 타령을 들어야 했다.

언니... 제사는 그냥 저희 집에서 혼자 지낼게요.. 내 앞길을 막는 건 아무래도 언니인 거 같아..

어렵사리 그녀의 제안을 뿌리쳤지만 하마터면 이름 모를 조상님께 제사상을 올릴 뻔했다. 이후로도 비슷한 언니 오빠들의 타령을 몇 번 더 들어주고 난 뒤 비로소 나와는 달리 선택적 길치가 되어버린 성실한 전도사 분들을 한눈에 알아보는 스킬이 장착되었다.



호구의 행적 3 : 넌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나는 받아주겠노라


나의 손 아래 혈연님(가끔은 님, 대부분은 놈) 께서는 항시 필요한 일이 있으실 경우에만 연락을 주신다.

주된 연락의 이유는 ‘돈’ 이거나 ‘돈으로도 안 되는 거’. 얄밉지만 어쩌겠나. 어렸을 적 귀여웠던 모습을 떠올리며, 괴롭혔던 내 모습을 반성하며,  대략 다 받아주고 있다. 어차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이 정도는 아까워하지 말자는 마음으로 내어 준다. 사랑이 샘솟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줄 수 있는 만큼은 퍼주고 싶어 하는 태생적 기질이 남아있는 것 같다. 물론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이라는 포인트를 앞으로도 유념해야 한다.






이 정도면 나는 호구인가?

호구의 사전적 정의는 ‘어수룩하여 이용하기 좋은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이기적인 마음으로 내 앞가림하는 게 먼저라 생각해 욕심부릴 때도 많다. 맞는 건 맞는 거, 틀린 건 틀린 거, 무언가를 판단하는 주관도 더 단단해졌다. 해가 바뀔 때마다 이전보다 조금 더 논리적이고 계산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이 업그레이드된다. 그렇게 계산 딱딱 잘하는 철두철미한 사람이 되어가다가도 어느 날 생각지 못한 곳에서 숨겨졌던 호구력(?)이 툭하고 튀어나와 손해를 입기도 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호구가 그렇게까지 나쁜 건가 싶다. 때로는 알고도 속는 것. 사랑하는 사람들 앞에서 호구를 자처하는 나의 모습을 보면 어쩔 수 없는 호구의 유전자가 내재되어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맘 가는 대로 퍼주고 후회 안 하고 잘 살면 된 거 아닐까.  호구라고 불리며 남들 비웃음 거리가 되는 건 살짝 서글프다.


호구도 나름의 사정이 있다는 것을 당신은 아는가? 호구는 어쩌면 사랑이나 측은지심이 남다른 사람들 일수도.  나는 그냥 나 생긴 대로 가끔 호구 짓도 하고 똑소리 나는 똑쟁이 짓도 하면서 살련다.



출처 : 국민약속 / 호구 성향 테스트



그래도 A++ 급은 좀 심한 듯.. 내가 한우면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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