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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하 Nov 24. 2020

엄마는 결국 라디오 스위치를 껐다.

라디오가 꺼진 뒤  동네 가득 울려 퍼지던 내 이름, 그 녀석이 왔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여름이면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골목에서부터 밥 짓는 냄새가 났다. 대문으로 들어서면 조금이나마 더위를 피하기 위해 현관을 활짝 열어 둔 채 분주히 저녁 식사를 준비하던 엄마가 나를 반겨주었다. 언제나 그랬듯 부엌 한 편에는 라디오가 시시콜콜한 세상사를 들려주며 엄마의 노동이 지루하지 않도록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내가 집에 오면 엄마는 듣고 있던 라디오의 볼륨을 낮췄다. 나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식탁 옆에 대충 책가방을 내려놓고 앉아서, 요리하고 있는 엄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늘어놓곤 했다. 같은 반 누가 누구를 좋아하는지, 선생님에게 꾸중을 받은 친구는 누구인지, 무엇을 하고 놀았고, 급식 반찬으로는 무엇이 나왔는지, 어떤 수업에서 칭찬을 받았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친구는 누구인지, 열심히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의 소재가 바닥을 드러낼 즈음이면 옷을 갈아입고 나와 부엌 한편에 놓인 라디오 옆에 배를 깔고 누운 채 알림장이나 숙제 따위를 펼쳤다. 이리저리 공책을 뒤적거리면서 실제로는 힐끔거리며 엄마의 요리하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이다. “엄마~ 물!”하며 괜히 귀찮은 요청을 하기도 하고 라디오에 나온 얘기를 핑계 삼아 엄마의 관심을 끌어 보기도 한다. 엄마는 간혹 내가 한 말을 못 들은 것 같았지만 대체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런 일이…!”, “오호 그래?” 등의 애정 어린 대답을 해주셨다.






그날도 어김없이 라디오를 들으며 저녁 식사 준비로 분주했던 것 같다. 나는 대문을 밀치듯이 열고 들어와 집안으로 쏜살같이 뛰어들어갔다. 엄마는 동그랗게 눈을 뜨며 무슨 일인지 물었고 나는 아무 일도 아니라고 했다. 조심스레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평소답지 않은 행동에 엄마는 고개를 갸웃하며 방 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엄마에게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방안에 버티고 앉아 숨을 고르고 있었다. 골목 어귀에서 나의 이름을 외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작게 들리던 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지자 심장이 콩닥거렸다. 엄마는 요리를 하느라 아직 못 들은 걸까? 초조해하는 찰나에 신나게 떠들던 라디오의 소리가 멈췄다. 방문 밖의 상황을 상상하며 숨죽인 채 귀를 기울였다. 애석하게도 나를 부르는 목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고 이윽고 도마를 때리던 경쾌한 칼질 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방 문을 열고 동태를 살폈다. 엄마는 소리를 따라 골목으로 나간 뒤였다. 곧이어 삐뚤어진 안경테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남자아이의 손을 붙잡고 집으로 돌아오는 엄마가 보였다. 어차피 숨을 곳도 없었다. 괜스레 나도 눈물이 나려고 했다.




남자아이는 코피를 흘리고 있었다. 엄마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남자아이를 식탁에 앉히고 피를 닦아주었다. 남자아이는 서러움에 씩씩 거리며 내가 자기를 때렸다고 말했다. 치사한 자식, 정당방위였는데 말이다. 엄마의 매서운 눈초리 속에서 마음에도 없는 사과를 해야 했다. 


그날 남자아이는 엄마가 차려준 저녁을 먹고 돌아갔다. 뜨끈한 저녁밥을 함께 한 뒤,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그날의 일은 비밀로 남겨졌다. 문득 어른이 되었을 녀석의 모습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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