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reelike Jan 18. 2021

남아있는 나날 The Remains of the Day

낮이 남겨놓은 것들

영화는 켄튼(엠마 톰슨) 양이 7년 만에 스티븐슨(앤서니 홉킨스)에게 보낸 편지를 읽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녀는 “매국노의 보금자리 헐리다”라는 ‘데일리 메일’에 난 기사를 보고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고 한다. 달링턴 경(제임스 폭스)은 그들에게 선량하고 점잖은 신사였기 때문이다. 달링턴 경이 사망하고 난 후 미국인 루이스(크리스토퍼 리브)가 달링턴 성을 샀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는 다행스러워했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당신도 계속 거기 있을 수 있겠군요.” 켄튼 양은 말한다. 일은 고되었지만 달링턴에서 있던 그때가 가장 행복했다며, 딸이 시집갔기에 달링턴 성에 복직할 의향이 있음을 밝힌다. 스티븐슨은 새로운 집주인 루이스의 “세상 구경 좀 하고 오게”라는 제안을 받아들여 그녀를 만나러 여행을 떠난다.           


스티븐스는 영국 귀족의 집사로 평생을 보냈다. 며칠간 영국 시골로 켄튼 양을 만나러 여행을 가면서 1930년대 달링턴경을 위해 일했던 지난날을 회고한다. 독일과 화합을 추진했던 달링턴 경은 종전 후 매국노가 되었다. 그는 매국노의 집에서 매국노를 평생 보살핀 사람이 되었다. 그는 달링턴 경을 신사라 생각했기에  단 한 치의 오차 없이 온 힘을 다해 보필했다. 심지어 평생 집사였던 아버지 윌리엄이 죽는 순간에도 바쁜 일을 처리하느라 임종을 지켜보지도 못했다. 일에 충실하기 위해 켄튼 양의 마음도 모른척했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 여행을 하면서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워했던 지난날을 되돌아보는 그의 표정이 공허해 보인다.     

     

영화에는 ‘신사’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온다. 경매에 나오는 달링턴 성에 있던 그림도 엘리자베스 시대 초상화 ‘신사도’다. 게다가 그가 여행 중에 자동차 기름이 떨어져 머문 곳의 1층 술집 여자주인이 그를 가리켜 ‘신사’라고 한다. 그 술집에 있던 다른 남자가 말한다. “영국 남자라면 다 신사라고 할 수 있죠. 영국에서 태어나는 건 자기 의견을 피력할 권리와 대표자 선출권을 가진다는 특권이 있소.” 그의 겉모습은 완벽한 신사지만,  그곳에서 마음이 편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는 그가 맡은 일, 집사 일에만 충실했던 사람이다. 설혹 시중을 들다가 들은 이야기가 있더라도 듣지 못했다고 하며, 자기에게 의견을 물어올 때는 모른다고 했다. 집주인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시중만 들뿐, 자기 의견을 피력하지 않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던 집사다. 그의 말이다. “달링턴 경은 진정한 신사분이었습니다. 모시고 있다는 게 늘 자랑스러웠죠. 전 집사였을 뿐입니다. 시중을 들뿐 의견을 피력하진 않았습니다. 저는 전적으로 신뢰했습니다. 하지만 말년에 가서 달링턴 경은 후회하셨습니다.” 


20년 만에 만난 켄튼 양의 상황이 갑자기 변했다. 딸아이가 임신을 해서 같이 있어 줘야 한다고 한다. 그녀는 20년 전 그를 떠났던 걸 후회하지만, 이제는 떠날 수가 없다. 


켄튼 양이 묻는다.

“하루 중 저녁이 가장 좋은 시간이래요. 가장 기다리는 시간이래요. 당신이 기다리는 건 뭔가요?” 

스티븐스는 아무 곳도 바라보지 않는 듯 멍한 눈동자를 하고 있다.

“달링턴 저택으로 돌아가서 빨리 하인들 문제를 해결하는 거요.... 네. 난 항상 일하고 또 일하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스티븐슨은 다시 못 볼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하며 그녀와 이별한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한치의 의심 없이 자랑스러워하며 살아왔다. 집사 일만이 그의 전부인 양 사랑조차 외면했다. 하지만 황혼 녘에 깨달은 지난날의 사랑, 새롭게 깨달은 것들이 자신이 살아온 인생이 정말 자랑스러운가를 묻고 있다. 애잔하고 맘이 아팠다. 자신에게 주어졌다 생각한 일을 하느라 평생을 감정을 누르고 살아온 그가 안타까웠다. 감정을 누르고 살았기에 감정을 표현하는 일에도 서툴러 20년을 마음에 두고 있던 여인에게도 마음을 표현하지 못한다. 하지만 비 오는 날 그녀와 헤어지면서 그도 좀 흔들리는듯하다.               


그가 달링턴 성으로 돌아오고 달링턴 성은 다시 화려한 옛 모습을 되찾을 준비를 한다. 그는 다시 충실한 집사가 되기로 선택한 것 같다. ‘신사도’ 그림이 제 자리를 찾는다. 꿋꿋이 살아남은 달링턴 성을 자신이 보살펴야 할 대상이라 생각한 걸까?  

         

잔잔하지만 여운이 많이 남는다. 여러 가지 생각하게 한다. ‘신사’에 대해서. 일과 사적인 생활, 감정을 알아차리고 돌보는 것에 대해서. 어디까지 의견을 표명할 것인가에 대해서. 아마추어와 프로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선한 사람도 잘못된 선택을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는 생각. 살아가면서 하는 선택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는 영화다.     


“무엇보다 당신이 기다리는 건 뭔가요?”라는 대사가 기억에 남는다.           

작가의 이전글 마음을 제대로 말할 수 있기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