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쁘지 않아도 괜찮은 날

오늘을 나누다

바쁘지 않은 하루를 보내고 나면 “오늘은 어떻게 보냈어?”라는 말에 그 하루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잠시 망설인다.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하기엔 하루가 너무 성의 없이 지나간 것 같고, 그렇다고 무언가를 했다고 말하기에는 딱 떠오르는 장면이 없다.

그런 때 오늘 이 하루가 완전히 비어 있지 않았다는 작은 해명이 들어간 말을 하기도 한다. 해명의 말이 쌓이면 별다른 의도 없이 물어보는 말에도 짜증이 묻어나기도 한다.


정말도 바쁘지 않은 날이 있다. 일정표가 비어 있고, 꼭 가야 할 곳도 없는 날. 다른 이들을 위해 무언가를 할 필요도 없는 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오늘을 서둘러 시작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처음에는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다. 좀 더 생산적인 사람이 되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쓸모를 증명해야 할 것 같은 날이기도 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해내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하루가 괜히 가벼워 보일까 봐 걱정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대부분은 나를 아주 엄격하게 보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해서 생긴 것이었다.


그런 날은 바쁘지 않은 날인데도 불구하고 생각들은 더 바쁘기도 하다. 괜히 한 번 더 들여다보게 되는 휴대폰 화면. 바쁘지 않은 시간 속에서는 생각이 자주 다른 곳으로 향한다. 그동안 미뤄두었던 감정들이 조금 늦은 속도로 따라온다. 왜 그 말이 마음에 남았는지, 왜 그날 유난히 지쳤는지. 당장 답을 찾지 않아도 되는 질문들이 곁에 머문다.


생각으로 바쁜 날은 배가 닻을 배려 멈추는 장면을 상상한다. 닻이 배를 바다에 고정하듯이 생각을 멈추고 마음이 쉬어야 하는 순간이다. 나비가 바람에 한들거리며 날다가 꽃잎에 내려앉아 쉬듯이 지금 이 순간 여기서 내 마음도 쉬고 싶다. 그래도 마음이 쉬지 못할 때는 서랍을 정리하고, 청소를 하고, 냉장고에 있는 재료로 뭔가를 만들어 보기도 한다. 창문 너머의 날씨, 식탁 위에 그대로 남아 있는 컵을 본다. 가끔은 생산적이지 않아도 그냥 있어도 괜찮다.


바쁘지 않지만 괜찮았던 날을 떠올려보면 그날은 스스로 모질게 몰아치지 않은 순간들, 뭘 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들, 숨 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괜찮은 순간들이 있는 날이었다. 스스로를 재촉하지 않고, 하루를 평가하려 들지 않은 날. 무언가를 증명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었던 날. 그 감각은 다음 날의 나를 덜 지치게 했다.


이제는 바쁘지 않은 하루를 조금 다른 마음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그날이 특별하지 않아도. 눈에 띄는 성과가 없어도 그 하루를 통과해 온 내가 있다는 사실 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겨보는 연습을 한다.


바쁘지 않아도 괜찮은 날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이 아니라 나를 너무 몰아붙이지 않은 날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조용히 지나가는 오늘도 조금은 다정한 하루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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