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오늘, 하이델베르크 성에 눈이 왔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때 나는 유럽으로 교환학생을 떠났다. 학기를 앞두고 짧은 여행을 했는데 첫 여행지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였고, 그 여행의 마지막 행선지는 기차로 50분 거리에 있는 하이델베르크였다.
눈이 펑펑 내리던 하이델베르크 성에서 한참을 머물다가 저녁이 다 되어서야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왔다. 독일에서의 마지막 밤이니 독일의 족발이라는 학센을 꼭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늦은 시각이었지만 식당의 자리는 거의 다 차 있었고, 결국 여러 명이 함께 앉는 긴 테이블에 합석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독일 누님들 옆에 앉게 되었다.
그들은 독일어 메뉴판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나를 부르더니, 독일어를 할 줄 아냐고 물었다. 내가 독일어는 못하지만 학센을 먹고 싶다고 말하자, 빙긋 웃더니 바로 주문을 하면 된다고 했다. 이곳은 맥주를 팔지 않으니 와인을 마시라는 추천과 함께. 주문이 끝나자 이번엔 반대편에 있던 중년의 미국 누님 두 명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여행을 왔다고 말하자 인생을 즐기라며 연신 브라보를 외쳤다. 그리고는 그들의 와인을 나와 독일 누님들에게 나누어주며 갑자기 “간빠이!”라고 외쳤다. 우리는 모두 엉겁결에 건배를 하고, 마치 이미 알던 사이처럼 떠들기 시작했다.
미국 누님들도 오늘이 휴가의 마지막 날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 밤을 즐겨야만 한다고 말하며 독한 칵테일도 연달아 시켜댔다. 살짝 맛을 본 내가 너무 독해서 맛이 없다고 말하자, 갑자기 다가오더니 “독한 칵테일을 먹어야 인생의 맛을 알 수 있어”라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마치 누아르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그리고는 “너는 지금 여자들에게 둘러 쌓여있네?”라고 말했는데, 함께 있던 누님들이 모두 손뼉을 치며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그저 “저..저는 참 운이 좋네..요”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와인 잔을 든 내 손은 떨리고 있었다. 마치 노르망디의 로버트 카파처럼.
식사를 마친 나는 10여 분간 고민했다. 이들과 함께 오늘 밤을 와인으로 더 적실 것인가, 아니면 숙소로 돌아가 내일 떠날 채비를 할 것인가. 마음 같아선 유쾌한 이 자리에서 독일의 마지막 밤을 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아침부터 시작된 여정으로 꽤 피곤했고, 이미 꽤 취기가 오른 상태였다. 지금 더 마시다가는 내일 뉴욕으로 돌아간다는 미국 누님의 캐리어 속에 들어갈 것만 같았다. 아쉽지만, 그들에게 고맙고 즐거웠다고 인사를 나누고 숙소로 돌아갔다.
여행을 떠나보면 기대했던 즐거움은 의외로 쉽게 놓치기 마련이다. 힘들게 찾아간 맛집은 마침 휴무이고, 버스를 놓치고 열차는 지연되곤 한다. 천신만고 끝에 찾아간 명소는 비가 내리기 마련이다. 그래도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아마 생각지도 못한, 선물과 같은 순간들을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은 추억이란 이름으로 가슴에 오랫동안 기억된다. 학센 맛집의 거친 누님들, 그리고 하이델베르크 성의 눈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