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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진 Jul 12. 2022

추억追憶: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함

지금보다 더 좋은 때란 없다.

    10년도 더 된 일이다. 나는 갓 스무 살이 된 신입생이었다. 처음 맞이한 여름방학은 지루했다. 비가 드문 고향과 달리 서울의 여름은 비가 잦았다. 기숙사 침대에 누워 하루 종일 천장만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난데없이 주어진 자유는 그렇게 흔적 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고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그와 특별히 자주 연락하는 사이는 아니었다. 다만 고3 시절을 함께 보냈다. 반(班)에서 유이하게 조간신문을 보는 사람이 그와 나였다. 덩치 큰 국사 선생님은 수업 때마다 우리 둘의 신문을 번갈아 봤다. 수능이 끝난 그해 겨울엔 전염병이 돌아 졸업여행을 가지 못했다. 그것이 아쉬운 몇몇이 모여 눈이 녹기 전 등산을 다녀왔다. 하산 후엔 술도 마셨다. 아직 교복을 입을 때였다. 그때도 그와 함께였다.


    무진아 계속 서울에 있냐? 나 서울 가면 같이 소주 한잔 할래? 직설적이던 그의 성격답게 곧바로 본론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그의 그런 면을 좋아한 것 같다. 거칠고 투박스럽기는 해도 두 번 고민할 것이 없었다. 그가 서울에 왔고 우리는 만났다. 먼저 당시만 해도 꽤나 인기가 좋던 명동을 구경했다. 이어서 여의도로 향했다. 국회의사당을 둘러보고 한강을 따라 걸었다.


    해가 떨어지자 우리는 신촌으로 자리를 옮겼다. 치킨이 대접 위에 담겨 우리에게 왔다. 오늘은 친구랑 둘이 왔네. 고향 안 내려갔어요? 단골집 이모가 정겹게 인사를 건넨다. 제 고향 친군데 서울에 놀러 왔어요. 저랑 오늘 서울 구경했어요. 듬직한 친구 하나 앞에 두고 신이 나서 말했다. 고놈들 참 의리 있네, 보기 좋네, 무진이는 오늘 기분 좋겠다. 이모가 던진 황홀한 말 덕분에 우리의 술잔에도 탄력이 붙는다. 쉴 틈이 없다.


   분명히 몇 달 전엔 둘이서 한 병을 겨우 먹을까 말까 했는데 꼴에 대학생이라고 주량이 많이도 늘었다. 새 술을 붓자마자 잔까지 삼켜 버린다. 한참을 떠들다 보니 어느덧 자정이 넘었다. 뻔한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3월부터 시작된 음주가무 이야기, 여자 이야기, 처음 가본 클럽 이야기, 서울은 어때, 야 난 느끼해서 서울말 못쓰겠다, 그놈은 대학 다니다 말고 바로 군대 갔던데, 아 우리도 가야 되지, 아 모르겠다, 가면 가는 거지, 짠하자!


    잠깐만, 내가 선물하나 줄게요. 술기운에 날아가기 직전, 이모가 우리를 다시 의자에 붙인다. 둘이 같이 붙어 앉아봐 내가 사진 하나 찍어줄게. 이모 손엔 폴라로이드 카메라가 있다. 서울 온 김에 사진 한 장 남겨가야지. 얼마나 좋아요. 친구끼리. 그렇게 우리는 사진 한 장을 가졌다. 친구는 지갑을 꺼내더니 내일로 티켓 옆에 나란히 그 사진을 꽂아두었다. 몸이 후끈했다. 술기운과 쑥스러움과 반가움과 기쁨 때문에.


    우리는 다음날에도 함께 놀자고 맹세했지만 늦잠에 빠진 나로 인해 그러지 못했다. 그는 인천을 거쳐 다시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리곤 오래지 않아 격동의 20살이 끝났다. 몇 달이 더 흐른 뒤, 우리는 각자의 훈련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군대에서 몇 번 편지를 주고받기도 했으나 그 이후로는 그를 만나지 못했다. 제대 후에는 각자의 삶 속으로 흩어졌다. 나는 긴 방황 끝에 취업을 했고, 그는 결혼을 하고 아이도 생겼다.


   오늘 출근길에 옛 사진을 훑어보다 그 폴라로이드 사진을 다시 마주쳤다. 20살의 바보들이 술에 취해 웃고 있다. 하필이면 사진에 찍힌 날짜가 딱 오늘이다. 당장이라도 전화를 걸고 싶은 충동이 든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우리는 20살이 아니고, 방학도 없으며, 심지어 출근 중이다. 연락도 조심스럽다. 그가 나의 연락을 어색해할 수도 있다. 당연하다. 안 본 지 10년이 넘었다. 그저 혼자 웃음 짓고 넘기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청개구리 본성은 어딜 가지 않는다.


    욱아! 잘 지내나! 애기 잘 크나! 스무 살의 오늘, 우리 같이 신나게 놀았더라. 이 사진 기억나나? 기대 반, 우려 반으로 나의 소식을 전한다. 얼마나 흘렀을까. 사방으로 전화벨이 울려대는 사무실에서 잠깐 짬을 내어 알림을 확인한다. 메시지가 와 있다. 좌우를 조심스레 살피고는 그의 답장을 열어본다.


    무진아! 잘 지내나? 시간 참 빠르다! 소주 한잔 하자! 니가 내려올래? 아니면 내가 올라갈까?


    오늘도 하나 배웠다. 오래된 친구에게 연락하기에 지금보다 좋은 때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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