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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진 Jun 05. 2023

#20 암스테르담에서 만난 헤밍웨이 3부(완)

샤워를 마치고 식당으로 나갔다. 보텔의 식당은 식사 시간 외에는 거실처럼 쓰이는 공용 공간이었다. 식탁에 앉아 밀린 일기를 쓰고 네덜란드 여행 일기와 벨기에로 들어갈 계획을 정리했다. 내가 일기를 다 쓰고 난 후에도 헤밍웨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돋보기안경을 쓰고 장부를 정리하는 것처럼 보였다. 덩치가 산만 한 사람이 글을 쓰고 있으니 펜이 이쑤시개처럼 보였다. 안경의 알도 그의 엄지손가락보다 작을 것 같았다. 저렇게 큰 손으로 자그마한 메모지에 어떻게 글씨를 써넣는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할 따름이다. 필기가 아니라 공예처럼 보였다. 



"너는 어디서 오는 길이냐?" 눈이 마주친 헤밍웨이가 물었다. 국적을 묻는 것인지 여정을 묻는 것인지 아리송했다. 이곳은 여행객들이 머무르는 곳이니 후자일 것으라 판단했다. "독일에서 오는 길인데요" 그러자 헤밍웨이는 짐짓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독일어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네덜란드어와 독일어를 비교해 구분해본 적은 없었지만 그 순간 명확히 알 수 있었다. 네덜란드어는 들으면 전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독일어는 강한 억양 때문에 뭔가 꼭 대답해야할 것 같은 의무감이 드는 언어다. 내가 독일어를 전혀 할 줄 모른다고 말하자 헤밍웨이는 독일에서 온 것 아니냐며 되물었다. 나는 한국에서 왔으며, 독일을 거쳐 네덜란드는 여행 중이고 며칠 뒤엔 벨기에로 넘어간다고 말했다. 헤밍웨이는 호탕하게 웃었다. "푸하하 그랫구만. 난 또 독일인인 줄 알았지" 편견이 전무한 그의 환대에 나도 빙그레 따라 웃었다.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의 눈이 다시 커졌다. "잠깐, 한국에서 왔다고? 그럼, 히딩크를 알겠네?" 현지 발음으로는 '거스' 히딩크가 아니라 '규스' 히딩크에 가까웠다. "당연히 알죠. 한국의 영웅인걸요" 즐거운 대화는 이어질수록 공간에 온기를 더했다. 따뜻함이 찬물의 기억을 잊기에 충분했다. 나의 여정에 대해 들은 그는 남은 네덜란드 여행을, 그리고 앞으로 이어질 여행을 응원한다고 말했다. 오랜 여행이 끝난 이후에도 이어질 삶에 대해서도. 헤밍웨이의 응원이 마치 화살처럼 내 마음에 경쾌하게 적중했다. 그 순간 비로소 이 보텔에 제대로 체크인한 기분이 들었다. 숙박시설의 단편적인 환영 인사가 아니라 지구여행자 동료의 인정처럼 느껴졌다. 



대화가 얼추 마무리되고 헤밍웨이는 다시 장부를 정리했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의 크기는 작았지만, 항구의 풍경을 담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부둣가에는 붉은 가로등이 켜졌고 그 빛이 창을 타고 들어와 식당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어두운 하늘과 검게 물든 운하 덕분에 망망대해에 이곳이 홀로 떠 있는 배처럼 느껴졌다. 부둣가에서도 배는 흔들렸다. 배가 조금씩 회전할 때마다 창밖의 풍경은 조금씩 바뀌었다. 사냥을 준비하는 동물처럼 이 배도 기지개를 끝내고 곧 출항할 것만 같았다. 생각이 여기에 이른 순간, 나는 비로소 이곳에서 머물러야 한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리고 이 자그마한 배가 조금씩 좋아지기 시작했다. 헤밍웨이는 여전히 장부를 정리하고 있다. 서류를 진지하게 살펴보다가 나랑 눈이 마주치면 빙그레 웃음 지었다. 



아, 헤밍웨이 아저씨! 이 도시도, 이 보트도, 아저씨도 정말 멋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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