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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진 Jun 04. 2023

#19 암스테르담에서 만난 헤밍웨이 2​​부

캐리어를 들고 배에 올라타자 마치 밀항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낡은 야상 점퍼에 덥수룩해진 파마머리, 추운 겨울바람이 망상의 결을 더 촘촘하게 만들었다. 이 작은 배에서 2일을 지내야 한다니. 어쩌면 이곳에서의 숙면이 밀항보다도 힘들지 모르겠다고 생각을 하며 선실 안으로 들어갔다. 배 안에는 덩치가 엄청나게 큰 중년 남성이 있었다. 큰 키에 떡 벌어진 어깨와 모자라지 않는 살집, 부리부리한 눈과 덥수룩한 턱수염이 헤밍웨이를 연상케 했다. 헤밍웨이는 입실 절차를 위해 간단한 질문을 몇 가지 던진 후 키를 건네주었다.



객실로 선 후 다시 충격에 빠졌다. 방이 너무도 작았다. 바닥에 캐리어를 온전히 펼칠 수도 없었고, 자그마한 침대 외에는 물건을 올려둘 탁자도 없었다. 거짓말을 보태지 않고 조금 큰 엘리베이터만 한 사이즈였다. 푹 쉬고 싶어 1인실을 예약했는데 이건 뭔가 속은 느낌이다. 그나마 와이파이는 정상이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오늘 겪은 일들에 빗대어 보면 객실 밖의 헤밍웨이가 "사실 와이파이 기기가 오늘 갑자기 고장나버렸지 뭐야."라고 말해도 별수 없었을 것이다.



숙소를 못찾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사라지자 그 자리를 허기가 채웠다. 거리로 돌아갔다. 보텔로 오던 길에 봤던 파스타 가게 '바피아노'로 향했다. 어둑한 밖과 달리 가게 안은 환한 조명으로 가득했고 그 아래는 사람들이 북적였다. 번호표를 뽑고 순서를 기다렸다. 파스타를 주문할 때는 요리사와 짧은 대화를 해야 했다. 면은 어떤 것으로 할지, 못 먹는 재료가 있는지. 반짝이는 그의 눈빛이 따뜻했다. 그의 정성이 진심이어서 시끌벅적한 가게 안에서도 전해지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파스타를 먹은 뒤엔 바로 보텔로 돌아갔다. 배를 채운 후 가볍게 거리를 산책하는 것이 나의 오래된 습관이지만 너무 피곤했다. 두 번 생각해볼 여지가 없을 정도로 확실한 피로였다. 그래도 보텔로 돌아가는 길은 그곳에서 나올 때에 비해 한결 가벼웠다. 파스타로 배를 채운 덕분인지 날카로운 감정들이 꼬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래, 뭐 배가 작을 수도 있지. 다시 자그마한 배에 올라타 선실을 지나 더 작은 객실로 들어갔다. 헤밍웨이는 여전히 선실 카운터에 앉아있었다.



샤워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객실 건너편(이라고 해 봤자 두 발자국 떨어진) 샤워실로 들어갔다. 샤워실은 더 이상 작을 수 없을 만큼 작았다. 거의 관짝에 들어간 기분이었다. 그래, 배도 작은데 샤워실은 더 작을 수밖에 없겠지라며 공복 때보다는 따뜻한 태도로 샤워실을 대했다. 그러나 샤워실은 차갑고 도도했다. 샤워기에선 따뜻한 물이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리고 애써봐도 물은 미지근함과 차가움 그사이의 불편한 지점에 머물렀다. 이미 몸은 젖었으니 다시 나가기도 애매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빠르게 씻으면 추위의 총량이 줄어들지 않을까 망상에 가까운 생각을 했다. 그것은 차가운 관짝 안에서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결국 나는 으아아아 소리를 지르며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과 마치 싸우듯이 씻었다. 격렬했다. 그날 신이 나를 보고 있었다면 관짝 안에서 하늘을 향해 소리치며 쉐도우 복싱을 하는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허겁지겁 샤워를 마치고 수건으로 추위를 닦았다. 온몸을 때린 냉수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수건으로 나를 닦는 건지 나로 수건을 닦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살아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한 겨울에도 찬물로 샤워하는 바다 사나이가 된 것일까. 아니면 찬물 밖에 안 나오는 배에 홀로 버려진 조난자일까. 온갖 망상을 하며 사지에 달라붙은 냉기를 잊으려 애썼다. 샤워실을 나와 (두 걸음 떨어진) 객실로 토끼처럼 튀어 들어갔다. 비로소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것 같았다. 예로부터 많은 이들이 지옥을 아주 뜨거운 곳으로 묘사하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종종 지옥이 한없이 차가운 곳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마 암스테르담을 여행한 이후부터 그런 생각이 든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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