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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진 Jun 12. 2023

#26 영월종교미술박물관 3부


우리는 대화를 이어가며 전시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영월종교박물미술관에는 총 2개의 전시관이 있으며 가톨릭관과 기타종교관으로 구분된다. 전시관 구성과 작가의 활동명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최바오로 작가는 가톨릭 신자다. 성상(聖像) 조각가로 유명하며 국내 대부분의 가톨릭 성지에는 그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기념우표에 실린 그의 작품도 김대건 신부의 성지인 솔뫼성지에 실제 전시된 작품이라고 했다. 성상 외에 공동작가로 참여한 작품으로는 광화문 이순신 동상과 세종대왕 동상이 있다고 했다. 깜짝 놀라 "제가 엄청난 분을 만나고 있네요."라고 너스레를 떨자 그는 시큰둥하게 답했다. "사람들은 다 내가 죽은 줄 알아.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는데!" 



가톨릭관을 들어가자 그윽한 나무 향이 강렬한 첫인상을 남긴다. 입구에 놓인 거대한 십자가상은 이곳이 전시관이 아니라 성당이나 수도원같이 성스러운 곳으로 느껴지게 한다. 전시관은 층고도 낮고 면적도 넓지 않다. 그런데 그 안을 나무조각들이 가득 채우고 있어 어림잡아도 한 시간은 족히 관람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럼 이제 편하게 관람하라고. 난 CCTV로 다 볼 수 있으니까 궁금한 거나 문제가 있으면 손만 흔들면 돼. 작가는 짧은 인사를 남기고는 자리를 비웠다. 나는 조각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기 시작했다. 학창 시절 미술 시간을 회상하며, 조각칼로 목판에 기억도 나지 않던 형상을 새기던 때를 떠올리며, 작가가 말했던 큰 아름드리나무를 생각하며, 조각을 새기는 작가의 모습을 상상하며.



조각의 주제는 주로 성경에 나오는 것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십자가, 가시 면류관, 못 박힌 손과 발 등 수난과 상흔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작품이 많았다. 작품들은 잔인함과 강렬함 그사이 어떤 지점에서 계속해서 진동했고 그 때문에 나는 쉬이 그 앞을 떠날 수 없었다. 그 가운데 십자가에 못 박힌 발을 표현한 작품이 있었다. 멀리서 본다면 마치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둔 것처럼 발목까지만 표현된 작품이었는데, 못이 얼마나 아프게도 박혀있는지 정말 나무속까지 아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조각은 못의 머리만 표현했을 뿐인데 그 뾰족한 끝까지 느낄 수 있었다. 발 주변은 붉은색 페인트로 피를 표현했는데 지금 막 피가 뿜어져 나온 것 같았다. 그야말로 실감 나는 작품이었다. 



그거 내가 18살 때 조각한 거야. 편안하게 보라던 작가는 10분도 채 되지 않아 다시 돌아왔다. 18살이요? 대단한데요. 지금 보면 습작이지. 어때 맘에 들어? 네, 대단히 강렬하고 조금 무서울 정도로 실제 모습 같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안 사지. 징그럽다고. 젠장. 그는 다시 사라졌다. 이쯤 돼서는 그의 비위를 맞추기도 어렵고, 그의 대답을 예상할 수도 없으며, 그의 등장도 대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작품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18살 때 못 박힌 발을 조각하는 소년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무엇이 그를 나무 덩어리 앞에 앉게 했고 끝끝내 이 작품을 완성하게 했을까. 마지막에 빨간 페인트를 칠하는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급식이 먹기 싫어 학교 쪽문으로 도망가 시장에서 국밥을 먹던 나의 18살이 생각났다. 



전시관을 가득 메운 작품들이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왔다. 조각이란 것이 보는 위치에 따라 모양이 달라지니 한 바퀴 빙 둘러보는 재미도 있었다. 코로나 시국에, 오전 시간에, 산속 깊은 곳에 있는 박물관이다 보니 한 시간이 지나도 관람객은 나 하나뿐이었다. 전시관을 통째로 빌린 VIP가 된 것처럼 팔짱도 껴보고 뒷짐도 져가며 감상했다. 하나의 조각을 지날 때마다 내 생각과 감정도 다양한 형태로 조각되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 나에게 조각은 하나의 '인상'에 불과했다. 단편적인 형태와 크기, 질감 정도만으로 '크다', '멋있다', '화려하다' 정도의 감상을 느낀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조각은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보는 이를 압도할 정도로 장대한 맛이 있어야 한다고. 그러나 전시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서는 자그마한 조각조차 이처럼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나를 이곳에 오게 한 그 관람평처럼.






                                                               <성모자상 79> 



가톨릭 전시관 끝부분에는 작가의 대표작인 <성모자상 79>가 있다.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작품인데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감동적인 작품이었다. 누구라도 그 앞에서는 오랫동안 서성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다른 작품을 보러 발길을 옮겼다가도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품에 안겨 있는 아기가 한없이 사랑스럽다가도 가여울 정도로 어여뻐 보였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번 안아보고 싶다가 안겨있는 그 모습이 부럽기도 했다. 가장 원초적이고 가장 강력한 형태의 사랑이 보편적 일상과 거룩한 신앙을 이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랑이 삶과 종교 사이의 유일한 통로일 것이다. 전시관을 한 바퀴 돌며 나는 어느새 고난과 상처, 희생과 헌신을 지나 사랑의 단계에 와 있었다.



어때, 잘 보고 있어? 다시 그가 등장했다. 하도 조용히 보길래 난 또 다 보고 나간 줄 알았네. 나는 20살의 술잔처럼 가득 찬 감정을 그에게 쏟아부었다. 선생님, 이건 언제 만드신 거예요? 너무 좋은데, 이 앞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겠어요. 너무 아름답습니다. 한참을 봤어요. 근데도 계속 보고 싶어요. 그는 선글라스 너머로 반짝이는 눈빛을 보내며 으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 작품은 피렌체 박물관이 매입해 전시하다가 이후 돈을 주고 다시 사 왔다고 했다. 물론 그와 나는 서로 기분이 좋아 각자 할 말만 쏟아냈으므로 그가 다른 작품을 가리켜 설명한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안 사 왔으면 큰일 날 뻔했네요"라고 답했던 것 같다. 시니컬한 내가 호들갑을 떨 만큼 그 작품은 그렇게나 좋았다. 그 작품을 감상했다는 표현보다는 만났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일을 해요? 공부하듯이 작품을 보는 것 보니 선생님 같기도 하고. 그가 물었다. 선생님은 아니고요. 그냥 회사원이에요. 근데 미술관 가는 걸 좋아하고 예술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까지 오게 되었네요. 그는 연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럼 혹시 종교는 있어요? 나는 어릴 적 세례를 받았지만 그 이후로는 성당에 나가지 않았다. 어린 나에겐 미사가 귀찮고 지루했다. 지금도 그 생각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가끔 해외여행을 다니면서 근처에 성당이 있으면 들리는 정도의 반가움을 느낄 뿐이다. 누군가 종교를 물으면 무교라고 답한다.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탄력 있게 받아치고 싶었다. 제 세례명이 대건 안드레아인데요.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까 그 우표?! 하하하핫. 그래요. 마저 편하게 관람하시고.... 2 관도 볼 거야? 한번 쏘아 올린 탄력은 쉽게 죽지 않는다. 


안 볼 수가 없겠는데요? 


작가는 호탕하게 웃으며 다시 자리를 떠난다. 그의 웃음소리가 나도 썩 반가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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