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볼펜을 빌려준 일이 있었다. 정확히 언제였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자연스럽게 건넸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급하게 무언가를 적어야 한다는 말에 나는 주머니에서 볼펜을 꺼내 주었고, 그 사람이 “고마워”라며 웃으며 받아갔다.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평범하고 사소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볼펜이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별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내 손에 익었을 뿐인 흔한 볼펜이었고, 언제든 새로 살 수 있는 물건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얼마고 지나 다른 볼펜을 쓰면서 약간의 불편함이 느껴질 때, 주머니에서 볼펜을 찾다가 헛손질할 때 생각났다. 내 볼펜, 어디 갔지?
내가 느꼈던 약간의 불편함과 헛헛함은 돌아오지 않은 볼펜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 사소한 일이 마음에 남아 있는 이유는 아마도 그것이 관계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관계에서의 작은 균형이 무너진 순간, 마음 한구석에서 그 어긋남이 자꾸만 튀어나왔던 것이다.
인간관계는 때로 이런 사소한 일에서 드러난다. 내가 먼저 연락하지 않으면 이어지지 않는 대화의 공백, 힘들다는 말을 했을 때 돌아오지 않는 답장 같은 것들. 우리는 보통 관계를 무너뜨리는 것이 큰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작 관계의 온도를 결정짓는 건 이런 작은 일들이다.
반대로, 관계를 따뜻하게 만드는 것 또한 사소한 일이다. 바쁜 와중에 보내온 짧은 안부 메시지, 예상치 못하게 건네받은 커피 한 잔, 힘들다는 말에 돌아오는 “괜찮아?”라는 다정한 한 마디. 우리는 그런 사소한 배려에서 사랑을 느끼고, 그런 작은 온기에서 관계의 진심을 발견한다.
볼펜이 돌아오지 않은 일이 내 마음에 오래 남았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히 물건 하나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에서의 균형과 배려에 대한 감각이었다. 나는 기꺼이 볼펜을 내어주었고, 상대는 그것을 편하게 받아갔다. 물론 그것을 되돌려 받지 못했다고 해서 관계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사소한 불균형이 마음에 작은 흔적을 남겼던 것이다. 그리고 그 약간의 불균형이 나를 약간 부정적으로 만들고, 약간 냉소적으로 만들었을 거다.
그러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였을지 모른다. 심지어 누군가가 내게 건넸던 작은 친절을 내가 무심히 흘려보내지는 않았을까? 누군가의 진심 어린 배려를 너무 쉽게 받아들이고, 돌려주지 않은 적은 없을까? 관계에서 사소한 일들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결국 상대의 마음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큰 사랑의 제스처가 아니라, 사소한 배려에서 진심을 느낀다.
그 생각을 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볼펜 하나를 잃어버린 일로 관계의 진심이 바뀌는 것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시에, 사소한 일들이 쌓여 관계의 온도를 만든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가 작은 배려를 받았을 때 고마움을 표현하고, 누군가 내게 건넨 친절에 조금 더 마음을 기울이기로 했다.
결국 인간관계는 크고 거창한 일에서 완성되지 않는다. 오랜 시간 이어진 관계일수록, 그 사이에는 수많은 사소한 일들이 얽혀 있다. 친구가 내게 빌려준 우산, 내가 친구에게 건넸던 고맙다는 말 한마디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돌아온 다정한 눈빛. 그런 사소한 순간들이 관계를 지탱하고, 온기를 만들어간다.
이런저런 생각을 뒤로하고 나는 빌려준 볼펜이 잘 있나 무심코 고개를 두리번대다 휑뎅그렁한 필통꽂이에 외로이 놓인 걸 보았다. 어떤 생각이 들기도 전에 나는 주머니에서 삼색볼펜을 마저 하나 더 꺼내 빌려간 이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 볼펜을 받아 든 사람의 눈에는 볼펜을 돌려주지 못한 약간의 미안함과 그것보다 더 많은 고마움이 담겨 있었다.
결국 중요한 건 볼펜이 아니라, 그것을 주고받는 마음이고, 나는 언제든 마음을 내어주고 싶어졌다. 앞으로 나는 기꺼이 볼펜을 빌려줄 거다. 누군가 그것을 돌려주지 않아도 괜찮다. 언젠가 내가 잊고 있던 볼펜이 예상치 못한 순간에 예상치 못한 호의로 돌아올지도 모른다.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내게 또 다른 작은 친절을 건네줄지도 모른다. 사소한 일이 관계를 만든다. 작은 배려에서 온기가 시작되고, 작은 무심함에서 거리가 생긴다. 나는 이제 사소한 것의 힘을 믿기로 했다. 그리고 볼펜 하나를 잃어버리더라도, 마음의 온기를 잃지 않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