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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묵 Feb 01. 2023

기억 더 하기

첫사랑

https://www.youtube.com/watch?v=hE09HEzmS9Y

테일즈 위버 OST인 Reminiscence, Vanilla Mood 편곡 버전, PC로 보시면 글과 함께 들을 수 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집중해야 할 일이 있으면 항상 이 노래를 틀어 놓는다. 노래를 따라 나를 어딘가 집어넣고 있으면 어느새 날 옛 기억으로 이끈다. 첫사랑의 서투름, 부슬비에도 젖어 버리던 마음을 내팽개친 사랑이 노래를 타고 다시 흐른다. 눈앞을 유유히 지나는 기억에 무엇인가를 좀 더해서 추억이라 불렀다.



유채색과 무채색인 첫사랑의 추억, 사랑에 색을 더한다



 조금 멍하니 붙잡고 있던 책의 자간을 응시하다 흐릿해진 초점 사이로 글자들이 일렁인다. 일렁임을 반기듯 눌러진 피아노 소리가 어깨를 붙잡고 날 어디로 집어넣자 순수한 시절로 페이드인 되며 기억이 다가온다. 그 무방비한 수용은 시리도록 밝은 유채색의 사랑을 떠오르게 한다. 처음은 왜 유별난 각인을 새기듯 기억되는지, 기억을 더 할 때마다 덕지덕지 칠해놓은 첫사랑의 모습은 화하도록 밝기만 하다. 그 밝은 빛깔 기억에 하잘것 없어지게 한 묵빛 채색을 더한다. 사랑을 재잘거리던 밝은 목소리에 우울의 목소리를 뒤덮어 칠하고, 손을 부여잡고서 걷는 굼뜬 걸음에 사랑을 느끼면서도 애써 외면하며 무채색 덧칠을 더해갔다. 조절 없이 붓기만 하는 미숙함이라 거칠 것 없이 사랑도, 아픔도 그렇게 아낌없이 부어서 색을 덧댄다. 어딘지 모를 시간에 바쳐진 첫사랑에 무채색 기억이 또 날카롭게 뿌려진다. 시간이 지나 제 맘대로 덧칠된 기억들을 헤집다 이내 풀어놓았다.




부슬비에도 흠뻑 젖은 사랑의 추억, 기억에 기억을 더 했다.


 머리가 굵어지고 나서도, 종종 옅은 비 냄새가 묻어 나오는 날이면 반가움에 부러 비를 맞곤 했다. 그래서 그날도 교실에 있는 우산도 외면한 채 열람실에서 책을 읽었다. 창문에 이슬진 빗방울처럼 쪼그만 그녀를 처음 보고 반했다. 옆에 앉아 이것저것 물어보는 내게, 종알거리며 답하는 그녀의 모습이 퍽이나 귀여웠다. 사랑이 원래 그렇다는 듯 방울진 모양으로 들러붙었다. 무방비한 내 마음은 덩어리째 방울진 네게 흠뻑 스미어 들어갔다. 조금 오는 비를 보며, 우산을 하루만 빌려줄 수 있냐고 물었다. 네가 걸어서 집에 갈 수 있으니 내가 먼저 데려다주고, 내가 다음날 우산을 가져다주겠다고 했다. 고작 10분 걸으면 있는 버스 정류장에 자기가 데려다준다는 말은 민폐라며 완곡히 거절했다. 물론, 다음 날도 보기 위한 나의 노력이었지만, 그 노력으로 같이한 하굣길에서 내 왼쪽 어깨는 비에 푹 젖었다. 머리 하나만큼 차이가 나는 그녀와 같이 우산을 쓰기 위해 짐짓 모른 채 어깨동무하며 얼굴을 나란히 맞췄다. 이건 진짜 비에 안 젖으려고 하는 노력이라는 말에 얼굴이 벌게진 그녀가 내게 뭐라 뭐라 중얼거렸다. 그 후로 비가 오지 않아도, 우산을 빌리지 않아도 그 아이와 함께 얼굴을 나란히 하고 어깨동무를 하며 하교했다. 그렇게 마음에 방울로 새김질하듯 그 아이를 사랑했다.


 사랑은 부슬비로도 온 마음이 흠뻑 젖어버릴 수 있었다. 그런 내게 눈도 못 마주친 채 영어 선생님이 그러는데, 키 큰 사람은 원래 키 작은 사람을 좋아하는 거래.라는 소릴 했다. 그 말을 하고 얼굴이 벌게진 채 땅을 보는 모습이 귀여워 가슴에 창을 하나 더 내어 방울진 마음을 매달아 놓았다. 나는 그런 저런 이유로 널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냥 너라서 좋은 거야.라는 말을 미처 하지 못했다. 그저 비 오는 날이면 하굣길에 손을 꼭 부여잡고서, 네게 우산을 기울여 혹여나 젖을라 맘 졸이기만 했다. 비가 오지 않는 날에도 부여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그 아이는 내리는 비 보다 기대는 사랑에 더 힘겨운 듯 기쁜 듯했다. 그러다 진흙탕을 만나면 십분 십오 분을 돌아서 느릿느릿 걸어갔었다. 우리는 비가 오지 않는 날에도 좀 더 빠른 비포장도로를 가지 않고 기어코 시간을 들여 굼뜨게 돌아갔다. 얼마쯤을 그런 날이 반복되자 새된 목소리로 손을 뿌리치더니 물었다. 친구가 그러던데, 손은 애인이 돼야 잡는 거래. 우리 무슨 사이야? 나는 길쭉하니 늘여지며 소리치는 빗방울이 부들부들 떨며 용기를 내는 모습을 멋대로 상상하며 말없이 걸어갔다. 왜? 왜! 아무 말도 안 하는 건데? 내 마음을 표현하는 데에 미숙했지만, 그래도 쪼그마한 빗방울 같은 그 아이의 용기를 외면하진 않았다. 함께 하던 하굣길에서 집 앞 가로등을 향해 처음으로 걸어갔다. 주뼛주뼛하던 그 아이는 무릎을 꿇으며 사귀자고 하던 나를 보며 도망치듯 엘리베이터로 뛰어갔다. 나는 놓칠세라 따라 뛰어 들어가 우리 사귀는 거다?라고 말했다. 빗방울 같은 그 아인 시뻘건 얼굴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의 세계에 사랑의 동심원을 자아냈다.


 가끔, 점심시간이 되면 같은 반 여자 아이 앞에 찾아와서 쪼그려 앉아 아닌 척하며 나를 계속 흘깃거렸는데, 그런 날이면 굳이 점잔 빼지 않고 뚫어져라 마주 보았다. 그렇게 우리는 꽁냥꽁냥 거렸다. 그런 날은 전날 집전화기가 열이 나도록 서로에 대해서 궁금증을 풀고 더 이상 할 말 없지?라는 물음에 사랑해라고 연신 대답한 날이었다. 그 아이와 사귀고 얼마 뒤 지나니 같은 반 아이가 내게 물었다. 네가 왜 그런 아이랑 만나? 더 이쁜 사람을 만나야지. 내가 소개해 줄까?라고 했다. 나는 걔가 어때서? 사랑을 모르네~ 라며 대꾸했다. 그러다 어느새 그 아이와 사귄다는 소문이 퍼져서 모두가 알게 됐다. 내가 무에 중요한 사람이라고 그렇게 가십거리로 씹어 댔는지는 모른다. 그러곤 이런저런 말들로 소문이 소문을 낳았다. 어찌 보면 그냥 지겨운 일상 대신 단물 빠질 때까지 씹어댈 그런 게 필요해서였을까. 그런 소문들이 부담스러웠던 그 아이는 우리는 중요한 시기니 공부에 전념하는 게 좋겠어라고 했다. 물론, 중요하지. 중요하지만, 난 네가 더 중요해.라고 말 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 아이를 안심시킬 조금의 용기도 생각 못하는 이기적인 놈이었다. 책 속에서 본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닌 내 마음은 그렇게 볼품없이 작고 초라했다. 나는 그 말이 온전히 나를 위한 말인지도 몰랐다. 나를 위하는 너의 마음을 해석할 필요도 없는 그런 조막만 한 아이였다면 달라졌을까.


 그래, 공부에 전념해야지. 그 말을 비장하게 씹어 삼키며 함께 하굣길에 나섰다. 무언가 달라진 나를 느꼈는지 그날은 내 한 손을 부여잡고 아스팔트 땅 위에 주저앉으며 오늘은 자기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나는 비정하게 내가 맨날 데려다주잖아. 왜 그렇게 떼를 쓰고 그래?라고 했다. 손을 부여잡고 가는 그날, 그날은 왜인지 비도 오지 않는 날임에도 어두컴컴하고 구름 사이로 마른번개들이 비쳤다. 마른번개 사이로 길 위의 주황색 선 만이 겨우 눈에 들었다. 실은 곁눈질로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계속 보던 그 아이를 외면했다. 나는 사랑을 볼 줄도 모르는 머저리였으므로 그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지도 못했다. 어두컴컴한 그 길 사이를 아무 말 없이 잡은 손을 놓고 걸으며 담담히 친구로 지내자는 말을 전했다. 그 아이는 시뻘게진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집으로 뛰쳐 들어갔다. 내가 사귀자고 했을 때 시뻘건 얼굴로 뛰어 들어가던 모습과는 색만 같았다. 그 후에 그 아이의 방울진 모습은 여전히 마음속에 한가득했으나 어두컴컴한 길을 걸어가는 나처럼 잠시 가리어졌었던 걸 알아챘다. 그 아인 그 후로 내 연락을 피했다. 그렇게 첫사랑은 어설프게 끝이 났지만, 꽤 긴 시간 동안 젖은 내 마음과 마르지 않던 빗방울들을 말리는 데 노력해야 했다. 서투르고 미숙하기만 했던 기억은 여전히 덧칠이 덜 된 유채색과 무채색 사이의 색감으로 추억된다. 미숙한 첫사랑의 기억이 노래를 따라 흐르다 끝났다. 난 첫사랑이 떠오르면 무언갈 더하지 못하고 더 하기만 한다. 무언가 더 이어져야 할 것 같은 이 노래의 마지막처럼 뚝 끊어진 그 기억을 더 했다. 그리고 이제는 겨우 재만 조금 남은 감정들이 날아갈 새라 조금 눌러 담아 써 내려갔다. 쓰면 써지는 게 글이라더니 휘발된 줄 알았던 기억과 감정들이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스민 감정들이 날아갈세라 방울진 감정과 기억을 모아 기억을 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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