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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묵 Jan 27. 2023

쓰다 ;


쓰다 1 ; 글로 나타내다 


 뭘 집어넣은 지 모를 내 머릿속 생각을 가만 들여다보면 빈 듯하면서도 쓰잘 데 없는 걸로 그득하다.

이런 상황을 지식이 지혜로 바뀌어 가는 과정이라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건다. 가끔 찾아오는 편두통이 내 머릿속을 병리학적으로 해석하고 싶어 한다. 타이레놀 두어 알로 병원 가는 발걸음을 막고 뭘 또 쓸데없이 집어넣는다. 책상 위에 널브러져 있는 쓰다만 메모 패드, 편지 패드, 원고지 등에 원고와 초고가 그득하다. 지구 모퉁이에 앉아서, 푸른 하늘의 별, 사랑하는 나의 아들, 제목 없이 무작정 써내려 간 글 몇, 난 무얼 쓰고 싶은 걸까. 브런치에도 작가의 서랍에 제목만 덜렁 쓰인 글 몇 개, 아이디어와 글 내용을 중구난방으로 써 놓은 초고 몇 개, 다 쓴 글 몇 개가 둥둥 떠다닌다. 문체도 제각각, 아이디어도 제각각, 이 것들이 내 머릿속에 들어가 있는 것들인지, 그래서 가끔씩 더 뱉어내라고 발길질하듯 편두통을 불러오는지, 차암 알 길이 없다. 쓰다 보면 내 머릿속에서 글쓰기란 게 정립될 줄 알았더니 더 거센 발길질로 뱉어내라고 성화다. 그래서 쓴다.



쓰다 2 ; 몸이나 물체 따위에 덮다

 

 모자 쓰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맞는 모자가 잘 없기 때문이다. 대가리가 커서 슬픈 짐승이여. 그래도 추운 날이면 후드티의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잠근다. 마스크를 쓰고 걸으면 흰 입김에 안경이 뽀얗게 물든다. 눈이라도 맞으면 좀 덜 외로워 보일 텐데 부산의 날씨는 센티멘털한 내 감성을 따라오지 못한다. 밤중에 1cm가 온다고 재난문자가 왔다. 안경의 뽀얀 김이 구석으로 물러나며 강원도에서 덮인 눈을 볼 때가 찾아온다. 폭설로 뒤덮인 산이며 사람이 그립다. 눈 내리는 날의 고요, 세상이 덮여가는 그 느낌이 계속 몸을 간질인다. 쓸어내려야 하는 눈이 퍽이나 좋은 걸 들키지 않으려 억지로 눈이다! 쓰레기!라고 소리 높였었다. 눈으로 덮인 날이면 온 정신이 계속 눈에 박혀 있었다. 그렇게 눈에 나를 박아 넣고 쓸어내리면서, 속으로는 투박한 편지의 머리말을 떠올리곤 했다. 펑펑 내리는 눈이 편지 쓰기를 재촉하는 듯해서 이렇게 또 종이를 뚫어 냅니다. 우리의 추억이 다시 이 눈처럼 쌓일 수 있을까요. 편지지에 우리의 추억을 조금 덮어 봅니다.



쓰다 3 ; 사람에게 어떤 일을 하게 하다.


 그래, 다 내가 잘못한 거네? 네 말대로 그렇게 잘못한 거니 헤어져야겠네. 처음으로 놀러 간 펜션에서 여자 친구는 언젠가 말해 준 핸드폰 비밀번호로 몰래 메신저를 샅샅이 살폈다. 외간 여자와 내통하는 건 아닌지 검열한다. 그게 아니라면 내가 범법행위는 안 하는지 파악하려는 걸까. 끝내 적당한 거리를 잡지 못한 그 사람은 심증만 있는 베테랑 형사처럼 자백을 유도했다. '나에게 할 말 없니?, 왜 잘못을 인정하지 않니?' 내가 친구와 이야기하며 나눈 그녀의 정보를 사랑 범죄의 전말처럼 꽤나 진정성 있게 분노했다. 사랑에도 잘잘못을 따져야 할 때가 있다. 누가 더 상대방을 사랑하는지, 그 가벼운 사랑의 무게추를 들었다 놨다 하며 저울질한다. 1의 잘못으로도 9의 무게를 가진 사랑 때문에 사랑은 소란스럽다. 


쓰다 4 ; 시체를 묻고 무덤을 만들다.


 첫 이별 후, 지긋한 세 번째 이별이 찾아와서야 사랑의 묘를 썼다. 불꽃같은 사랑과 재만 남은 사랑의 건덕지를 몸에 묻혀가며 쓸 묘비명을 신중히 골랐다. 오랜 고민에도 묘비명에 무언가를 쓸 수 없었다. 무명의 비를 세워 묘를 달래듯 세월을 녹여 애끓는 마음을 달랬다. 자정에 가까워지는 시간임에도 멀리서 나를 위로해 주러 친구가 달려왔다. 살결에 진득이 눌어붙은 인연의 녹을 밤새 정으로 오며 가며 두들긴다. 뚱- 땅- 뚱- 땅- 거리는 호흡이 꽤나 잘 맞다. 다음에는 좀 더 너를 존중해 주는 사람을 만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했잖냐. 다음 인연은 잘 맞는 사람을 만나. 뚱- 땅- 뚱- 땅-


쓰다 5 ; 장기나 윷놀이 따위에서 말을 규정대로 옮겨 놓다.


 사랑한다. 사랑 안 한다. 사랑한다. 사랑 안 한다. 무명의 묘비 앞을 서성이는 나를 보며 놀리는 듯 말한다. 그 이름은 속마음. 사랑 안 한다에 몸을 옮긴다. 그러자 예고 없이 덜컥 주어지는 호의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아직은- 아직은- 아직은- 쫑알거리는 속마음이 귀찮게 또 놀려댄다. 가치 없어진 호의에 못내 미안함이 든다. 이번에는 사랑한다에 몸을 옮긴다. 귀여운 고양이에게 나도 손을 한 껏 비비고, 사람들에게도 이유 없는 호의를 내민다. 새싹에 햇살에 낙엽에 바람에 날 내던진다. 사랑함에 이유를 붙이자니 그것 또한 고루해 보인다. 그래서 그냥이라는 말로 가볍게 나부낀다. 사랑한다는 말은 가볍게 날 또 어딘가로 옮긴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쓰다 6 ; 달갑지 않고 싫거나 괴롭다.


 목적이 뚜렷한 언행은 싫지 않다. 구태여 말을 돌리지 않고 서로의 목적을 확인하고 등을 돌린다. 반면에 목적을 숨기는 언행은 싫다. 이유 없는 호의는 없다지만 굳이 굳이 아닌 척 내뺀다. 부러 인사를 채 받지 않고, 고개를 휙 돌린다. 먹혀가는 인사가 답답하다. 어쩌라고- 어쩌라고- 사랑한다는 말에 서 있는 속마음이 팩하니 소리 지른다. 어쩌라고- 어쩌라고- 나도 아기새처럼 그 소리를 거듭 낸다. 내가 좋은 것, 좋아하는 사람만 보고 살기에도 바쁠 삶에서 어찌 심력을 낭비해야 하는 것이냐. 예전 같으면 내가 무얼 잘못했는지 스스로 반성하자며 체념의 시간을 가졌겠지만 이제는 대신에 외친다. 어쩌라고- 어쩌라고- 내가 좋아하는 것에만 몰두하기에도 삶은 짧다. 사랑 안 한다로 가려는 속마음의 덜미를 꽉 붙잡아 같이 지껄인다. 어쩌라고- 어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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