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보면 여행은 책이랑도 꼭 같다고 느낀다.일평생 수 천, 수 만의 책을 읽어도 앞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이 무수히 더 많을 거다. 그렇다고 남은 생애를 독서를 위해 모조리 바칠 수도 없으니, 그냥 제일 맛있다고 생각하는 책 정도에만 이빨 자국을 내고 와그작거리며 살 뿐이다. 내가 생각하는 여행도 비슷하다. 모든 곳에서 살아가진 못하니 내가 스며들었던 곳의 사진 몇 장, 글귀 몇 개와 기억 한 움큼 정도로 생색내는 거다. 이따금 유별나게 괴팍한 하루를 보낼 때면, 그럴 수 있지 라는 말로 덜미를 쓰다듬어 주면 아주 좋고.
이렇듯 여행을 잘하기 위한 기술은 바로 그럴 수 있지라는 마음가짐이다. 나의 여행은 좋아하는 것에 잠깐 스며들듯 하는 거라 무엇보다 마음가짐이 가장 중요하다. 작은 것에도 스며들 준비를 해야 한다. 당장 핸드폰에서 눈을 떼고 새 모양 구름을 눈에 박아야 하고, 예정 없는 간이역에 뛰어들어 국수 먹을 준비를 하고, 지나가는 어르신에게 어디로 가면 바람이 가장 많이 부는지를 물어야 한다. 또, 우연히 이쁜 들꽃을 보면 이름을 뭘로 지어 줄지도 고민해야 한다. 나는 그렇게 세상에 잇자국을 내며 여행한다.
MZ 식으로 말하자면, ENFP인 나의 성향은 계획의 수립과 이행보다는 여행의 순간과 감성이 중요한 셈이다. 그래서 어느 골목길에서 맞은 바람이 제갈량으로 빙의한 나에게 동남풍으로 부는지, 언뜻 풍기는 고소한 고등어자반이 어느 백반집 것인지, 골목길의 두 갈래길의 종착지가 어떻게 다를지 정도가 오히려 더 관심이 간다. 어차피 모든 곳에서 살아보지 못할 거라면, 모든 삶이 나에게 제법 맛있는 하루가 되면 될 것 아닌가?
그래서 나에게 있어서 여행은 미지의 경험이자 제법 맛있게 씹어 낸 시간의 잇자국이다. 같은 책을 여러 번 읽으면 그때마다 달라지듯 여행도 그렇다. 조금 번거롭고 불쾌했던 여행이라도 그럴 수 있지라며 넘긴 자국 자국들이 되어 나를 발효시키고 잇자국 사이로 구수한 추억과 시간들이 녹진하게 만드는 거. 그러다 약효가 떨어져 에라, 세상아-라는 속엣말이 절로 나오면 또 약간의 짐을 꾸려 여행을 떠나면 되는 거다. 그게 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