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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묵 Feb 10. 2023

723 423 01888 612

보 고 있 다

 

 고등학교 입학식이 진행되는 날 입학 테스트를 시원하게 말아먹고 봄바람이 좋네 같은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그날따라 제법 정취가 났던 것이 비가 오는 시험지에서 비냄새를 맡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친구와 하굣길을 나서는데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왔다. 안녕, 잘 지냈어? 오랜만에 얼굴 보니까 몰라보겠더라. 단연코 처음 보는 번호가 분명했다. 그래도 왠지 문체는 여자일 거란 생각이 들게 했다.


 수컷의 생기발랄함은 언제 터질까? 바로 암컷의 관심을 독차지할 때다. 옆에서 몰래 문자를 쳐다본 수컷 친구의 아우성은 나를 사파리 초원으로 데려 온 듯했다. 남녀공학에 진학하자마자 나에게도 설레는 봄이 오나? 얼른 답장하라는 친구의 성화에 못 이긴 척하며 안녕, 그런데 번호가 없네. 누구더라?라는 나 제법 젠틀해요라는 태도로 답장했다. 문자를 보내자마자 기억 안 나나 보네?라고 답장이 왔다. 어느새 친구들에게 배신자로 몰리게 됐지만 변명 대신 승자의 비웃음을 한껏 날려줬다. 


 그 후로 밤까지 입학식 하면서 모여있을 때 나는 너 멀리서 봤었어. 왜 기억을 못 해. 내가 누구게?라는 문자를 받았지만, 결국 자신이 누구 인지는 끝끝내 말하지 않았다. 나는 너 아는데, 왜 넌 날 몰라 라는 도돌이표가 제법 지겨워져서 다음 날 매점 앞에서 음료수를 사줄 테니까 잠깐 보자고 넌지시 물었다. 그러자 바로 남자애가 대범하네~라는 문자가 왔다. 순간 내가 알고 있는 대범함이 얘가 알고 있는 대범함과 같은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됐건 2교시 마치고 매점 앞에서 보자.라는 문자를 끝으로 마구 분홍빛 학교 생활을 꿈꾸며 헤실헤실 웃었다. 아버진 그런 내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빙긋 웃으시곤 얼른 자라고 인사해 주었다. 그런데, 얘는 어떻게 날 아는 거지. 그보다 번호는 어떻게 알았지. 흠- 냐-


 익명의 여학생으로부터 문자를 받은 이튿날, 괜히 봄바람에 웃으며 등교하는 길에 친구들은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첫눈에 반했다냐? 네 번호는 어떻게 알고 연락했대? 대답이 궁해져서 나도 모르겠단 대답을 했지만 별로 안 믿는 눈초리였다. 그래도 직접 만나고 그 결과는 공유하기로 약속했다.


 침을 꼴깍 삼키며 매점 자판기 옆에서 음료수를 하나 뽑고선 기다리는데, 저 멀리 복도 끝에서 건장한 여학생 한 명과 커다란 안경을 쓴 여학생 한 명이 쭈뼛대며 다가왔다. 전혀 기억이 없는지라 얼굴에 물음표를 띄워 놓고 있는데, 안경을 쓴 여학생이 한 발 더 다가오며 내 손에 든 음료수를 잽싸게 낚아채고선 재빠르게 왔던 길로 뛰어 나갔다. 건장한 여학생은 어색하게 웃으며 되돌아갔는데, 도무지 상황 파악이 안 됐다. 


 너 누구야라고 문자로 물었던 말에 대답도 안 하고 음료수만 저렇게 가지고 가버리다니. 그렇게 동전만 자판기에 헌납한 채 교실로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는데, 띠링- 문자가 왔다. 음료수 잘 먹을게~ 나 콜라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알았어? 몰랐다. 누군지도 모르는데 콜라를 좋아하는지는 어떻게 안단 말인가. 어느새 봄바람을 타고 올 것 같았던 기분은 조금씩 찝찝함으로 변해갔다. 그런데, 내가 준 음료수가 그녀에겐 기폭제가 된 걸까? 그 후로 문자가 날아오는 빈도가 점점 잦아지기 시작했다.


 음료수를 준 날부터 집에 도착하는 밤 10시 즈음이 될 때면 푸는 사람 없는 스무고개처럼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문자로 보냈다.


내 이름은 ㅇㅇㅇ이야.

누구지? 이름을 들어도 기억이 안 났다. 전혀 처음 들어 본 사람이었다.


너는 왜 나한테 음료수 준거야?

그야 처음 보는 데 빈 손으로 만나면 어색하니 음료수라도 먹으며 이야기 나누려던 거지. 콜라에 특별한 의미가 있나?


난 너 좋아하는데, 그래서 너 계속 생각해 왔어.

어? 언제 봤다고 좋아했었다는 거야. 미안한데 나는 고등학생이 되면 여자친구 사귈 생각이 없어. 공부만 할 거야.


네가 콜라 준 건 너도 나 좋다는 거 아냐?

아니, 왜 자꾸 별 것 아닌 데에 의미 부여하는 거야. 아무 의미도 없던 거였다니까.


그래도 나는 널 좋아해

... 그래 그 마음은 고맙다.


 3월 초에 그렇게 스무고개 하듯 내게 보낸 문자는 전혀 소통이 안 됐다. 언제부터 날 알게 됐는지, 번호는 어떻게 알았는지 물어보는 질문에는 답변을 피하고 구애에 대한 확답만을 내게서 원했다. 소름이 끼쳤다. 내게서 뭘 원하는지 궁금했다. 아니, 궁금함을 덮어두고 애써 무시하고자 똑같은 말을 내뱉는 앵무새가 되기로 결심했다. 미안한데, 나는 고등학교 다니면서 여자친구 만날 생각이 없어. 너라서 안 사귄다고 그런 건 아니야. 그때는 몰랐다. 이 말이 어떻게 되돌아올지를. 밤늦게 문자를 하는 아들을 보는 아버진 놀리듯 연애하는 것 아니냐며 물었다. 힘없이 아니라는 말만 하고 잠자리를 뒤척였다.


3월 14일 화이트 데이, 집 문고리에 그녀가 사탕을 걸어 놓고 갔다.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네가 보냈냐고 문자를 했다. 알아주어 고맙다는 문자가 왔지만 답장하지 않았다.


4월 생일날, 내가 평소에 갖고 싶어 하던 필기구를 나에게 주기 위해 찾아왔다. 내가 이걸 원하는지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지만 배시시 웃기만 했다. 그래도 잘 쓰겠다고 했다.


달을 거듭할수록 점점 늘어나는 문자와 선물이 너무나 부담스러웠다. 더 이상 집에 찾아오지 말라고 문자하고 차단했다.


그 덕분에 평온하게 하루를 보내던 나에게 아버지가 물었다.


요샌 문자 안 하니?


그제야 머릿속에 형광등이 켜졌다.


아빤 내가 누구랑 문자 하는지 알고 있어?


아, 그럼 당연하지. 네가 기억할지는 모르겠는데. 아빠랑 친한 친구인 집에 놀러 갔을 때 그 집 딸내미가 하나 있었는데. 같은 고등학교에 갔다는 소식을 듣고 이것저것 묻던데? 전화번호랑 생일이 언젠지, 갖고 싶어 하던 건 없는지? 둘이 잘 어울릴 것 같으니 궁합 보러 간다고도 하더라고. 사귀고 있던 거 아녔니?


그제야 퍼즐이 맞았다. 차단 문자 수신함에 들어가니 문자가 잔뜩 쌓여 있었다.


사실 우리 궁합을 봤는데 잘 어울린대. 안 궁금해?


너 어릴 땐 공룡이나 로봇 장난감 좋아했었잖아. 지금은 안 좋아해?


요새는 지나가면서 보기 힘들더라. 몇 시에 학교에 오는 거야?


머리가 띵했다. 그랬구나. 아빠한테 물어봐서 내 정보를 다 알고 있던 거구나. 난 정말 기억도 안 날 때 몇 번 봤을 뿐인데..


 문자의 답장이 오지 않자 그녀는 다른 번호로 발신 번호를 바꾸어 문자 하기 시작했다. 발신인 번호 1004로 좋다는 마음을 보내기도 하고 어느 날은 아무 의미 없는 번호로 발신인을 보내기도 했다. 그날은 방학중에 열람실에서 같이 공부하는 남사친 여사친 무리와 편의점엘 들렸었다. 산중에 있는 고등학교 덕에 가파른 비탈길을 있는 편의점을 갈 때면 힘들게 올라와야 했는데, 경사가 아주 심해 천천히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문자가 왔다.


발신인 : 723 423 01888 612

여자는 안 만난다더니 너무하네.


섬뜩한 기분을 애써 달래며 발신인 숫자를 천지인 키패드를 눌러보았다.


723 보

423 고

01888 있

612 다


 헉헉 대며 올라가는 친구들 사이로 고개를 들어 가파른 경사 위 학교 유리창을 살폈다. 거리가 제법 멀어 확신할 수 없었지만 긴 교복치마가 얼핏 보이는 듯했다. 방학중이라 열람실에서 따로 공부하는 사람 말고는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눈가를 찌푸려 집중하자 저 멀리 5층에서 날 보고 있었다.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가쁘게 숨을 쉬는데 힘들어서 숨이 가쁜지 심적으로 힘들어서 그런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어쩌면 둘 다였을 것 같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저 문자 이후로 발신인을 바꿔서 문자를 보내는 일은 없었다. 보고 있다고 문자를 보낸 게 고등학교 3학년 때 일이라는 게 나에겐 불행이었지만, 고등학교 3년 동안 어찌 보면 사생 팬(?)을 달고 다닌 셈이다. 잘난 것 하나 없는 나를 왜 저렇게까지 좋아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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