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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묵 Feb 12. 2023

일요일 오후 3시

일요일 오후 3시, 집 근처에 새로 생긴 카페에 들어섰다.


 일요일 오후 3시가 되면 왠지 마음이 너그러워진다. 온전히 나를 위해 쓰려고 노력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주중에는 늘 뭐라도 쏟아내야 한다. 뭐라도 이뤄 보려고 꼼지락 거리는 내 모습을 돌아보면 괜히 눈물겹다. 그렇게 아등바등해도 내 것 하나 없어 보이는 삶이라는 생각이 들 때면 더욱 그렇다. 그래서 일요일에는 의식적으로 가방에 좋아하는 무언갈 넣어서 집 밖을 나선다.


 오늘은 좋아하는 무언가에 당첨된 게 책이다. 어떤 때는 원고지 일 때가 있고, 어떤 때는 무선 이어폰, 어떤 때는 노트북이다. 원고지를 들고 나서는 날이면 느슨해진 마음 따라 무작정 휘갈기기 일쑤고, 무선 이어폰을 챙기는 날이면 한 곡만 주야장천 들으며 멍 때린다. 노트북을 챙기면 괜히 이것저것 더 하게 된다. 책을 챙긴 날에는 책에 날 그냥 집어넣으면 되니 일요일 오후를 즐기기에 안성맞춤이다.


 공원에 가려던 발걸음을 멈춰 새로 생긴 카페로 향했다. 바닐라라떼를 주문하고 대형테이블을 독차지했다. 앉아 있는 테이블 옆에선 아이들과 주부의 신나는 카페 탐험이 이어지고, 테이블 대각선 앞의 스피커에선 You Raise Me Up 노래가 가수만 바꿔서 계속 나온다. 앉은자리 뒤에선 사이비를 물리치는 방법을 전화로 친구에게 일장 연설을 하고 있다. <죄송합니다! 제가 살인죄로 출소한 지 얼마 안 돼서 개인 정보를 드리기 좀 그래요! 그렇게 얘기하라고!> 전화기에 우렁차게 말한다. 과연 저게 최선일까. 우당탕탕하는 옆자리, 자꾸 한계를 넘어선다는 노래, 노래에 감명받은 듯 보이는 사이비 퇴치녀 사이로 책을 편다.


 주문한 바닐라라떼를 한 모금을 마셨다. 죠리퐁 같은 달달한 바닐라라떼를 예상했는데 약간은 씁쓸하다. 그저 달기만 한 날보다 약간 씁쓸한 맛이 나는 하루가 기억에 남긴 하다는 어설픈 생각을 한다. 0도 잡지 제작을 끝으로 해산될 줄 알았던 우리의 모임은 독서모임으로 이어지게 됐다. 어리지만 강한 존재감을 발산하던 분의 제안으로 후속모임을 이어가게 됐다. 어수선한 카페 안에서 책을 집어 들어 한 시간 동안 내리읽었다. 그분의 제안으로 시작한 독서 모임이긴 하지만 나도 책 읽는 걸 좋아하니 괜찮은 생각이라고 했는데, 책을 다 보고서 기억에 남는 문장이 없었다. 황급히 그럴싸해 보이는 문장 몇을 카메라로 찍고선 책을 덮었다.


 그러고 왜 책에서 특기해서 기억할만한 내용이 없는지를 떠올렸다. <일하면서 놀고 놀면서 일하자>의 준말인듯한 일놀놀일은 책의 알맹이가 없다고 느껴졌다. 독창성이나 지식의 전달도 없던 것 같고.. 아니면 저자가 전달을 잘했으나 내가 그걸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똑똑하지 못했거나. 저자가 생각하는 일과 놀이의 정의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어디에선가 본 듯한 문장들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졌다. 책을 읽으며 가장 기억에 남는 문장은 상사에게서 받은 추천사인데, 우리끼리만 비밀로 가지고 있자던 아이디어를 풀어놓는 건 아니겠죠?라는 상사의 추천사. 안 풀어놨다. 저자는 풀어놨다고 생각했는지 몰라도 기억에 없는 걸 보면 아닌 것 같다.


 책을 덮고 바닐라라떼를 크게 두어 모금 마셨다. 그리고 전에 직장에서 재밌게 일했던 때를 회상했다. 부산에서 매장관리를 하며 추석에 아주 바쁘게 지내며 일했을 때, 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나를 주방에서 메인으로 기용했다. 본사에서 와서 함께 일하는 사장님에 대한 부담감 때문인지는 몰라도 난 아무렇지 않아서 오히려 좋았다. 일이 재밌었으니까. 막내로 일하면서도 웃음이 끊이지 않고 일하는 모습을 사장님이 좋게 봐준 덕분에 입사한 지 두 달 만에 대리로 승진하고 본사로 가기도 했다. 그때 일하는 게 정말 재밌다고 느꼈는데 저자는 왜 자기만의 경험을 책에 풀어놓지 않고 뻔한 이야기들만 적어 놓은 걸까. 조금 아쉽긴 하지만 이런 추억을 떠 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책의 콘셉트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마케터의 일기를 훔쳐본 느낌이랄까.


 한 시간 동안 책을 훑으니 카페가 제법 한산해졌다. 새로 생긴 카페는 시청 주변에 있어서 그런지 주말 손님이 적어 보였다. 기지개를 켜고 꽤나 자주 올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느슨한 일요일 오후에 긴장감을 주기엔 적절한 곳처럼 보였다. 다음에는 원고지를 챙겨 와야겠다. 귓가에 계속 똑같은 가사를 뱉는 스피커가 있으니 추억을 곱씹기 좋아 보인다. 가볍게 기지개를 켜고 짐을 정리했다. 옷과 머플러에서 나오는 부스럭거림에 아르바이트생이 기쁨의 추임새를 넣는 것처럼 보였다. 일몰까지는 시간이 제법 남았다. 여유롭게 걷다 보면 집 앞의 공원응 걸을 생각에 흥이 올랐다. 어쩌면 흐린 날 가끔씩 볼 수 있는 멋진 노을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덜렁이는 마음에 책을 챙겨 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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