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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묵 Feb 17. 2023

밤길

 

 밤길 걷는 게 좋다. 활기찬 낮길과는 다른 밤길의 고요와 적막이 좋다. 밤길의 분위기는 날 감상적이고 감정적이게 한다는 점에서 묘미가 있다. 특히 낮동안 차량이나 사람이 많았던 길을 늦은 밤시간 혼자 점령하는 때라면 묘미는 배가된다. 중앙선을 아주 느리게 밟으며 허수아비처럼 팔을 양 옆으로 쭉 뻗어 걷고, 상상 속 연극에서 주연 배우가 되어 이별 연기를 흉내 내보기도 하면서. 혼자만의 감성을 토해낼 때면 조금의 뻘쭘함과 배덕감에 아무도 없는 도로 위를 괜히 빙 둘러본다.


 그렇게 밤길에 나름의 감성을 표현해 내보고 나면 최근 겪은 사건이나 감정을 다시 맛보는 시간도 가진다. 미처 곱씹지 못했던 생각과 감정들을 어두운 밤길에다 마구 풀어놓고, 늘어진 생각과 감정을 조용히 따라가면서 맛본다. 그렇기에 낮길의 목적지를 향하는 빠른 걸음도 밤길에서는 느릿하게 바뀐다. 뒤꿈치로 감정들을 자근자근 밟으며 걸어야 하니 빨리 걸을 순 없다. 정리되지 않는 생각들은 걸음을 더 굼뜨게 한다.  


 사람이 무엇이고 사랑이 무엇인지 잇몸으로 삶은 감자를 으깨듯 정리한다. 부드럽게 뭉개지는 개념과 정의를 버무려 나름의 조화를 이뤄내기 위해 이리저리 섞는다. 불꽃같이 지난 사랑과 감정들이 잇몸 사이를 화끈하게 데어 온다. 미숙한 과거의 뒤통수를 보며 과장된 사람과 사랑의 의미를 머릿속으로 이리저리 굴린다. 조금쯤 어른이 된 지금, 불현듯 떠오르는 노래 한 소절로 그 시절의 감정을 위로한다.  


<이젠 알아요. 너무 깊은 사랑은 외려 슬픈 마지막을 가져온다는 걸
그대여 빌게요. 다음번의 사랑은 우리 같지 않길 부디 아픔이 없이>

노래, 다시 사랑한다면 中


 30대가 되기 전, 이 한 몸을 던져 무엇이든 사랑하길 바랐으나 정작 그 마지막은 슬프기만 했다. 밤길에서의 노래 한 소절로 스스로에게 작은 위로와 위안을 건넨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너무 깊은 사랑은 외려 슬픈 마지막을 가져온다는 걸-, 30대에 접어들면서 누군갈 오래 사랑하기 위해선 조금 덜 사랑해야 한다는 게 어떤 건지 조금 알 것 같다. 일단, 나부터 좀 똑바로 서고- 두 발에 뿌리 깊숙이 넣고-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양팔을 벌리고- 지나는 이에게 조금의 사랑을 건네기, 그런 모습은 마치 작은 버들이 된 듯한 느낌을 준다.



가변차로 앞에서 부정적인 생각들을 흘려보낸다.

 

 가변차로 옆을 거닐던 밤길에서 생각 정리를 하며 떠 오르는 것 여럿을 또 이리저리 굴린다. 삶에 정답은 없으니 눈앞에 것에 최선을 다하자는 마음가짐에 괜한 심통을 내보기도 하고, 내가 원하는 게 뭔가? 나도 어차피 세월에 무뎌지고 더뎌질 뿐 아닌가? 느지막한 밤에 또 찾아온 생각의 꼬리는 부정의 연쇄작용처럼 나를 옭아맨다. 감정을 밟아간다 한들 목표를 찾을 수 없고, 그저 행복해하는 것도 할 수 없을 것처럼 느껴진다. 세상을 바보처럼 계산 없이 살아내고 싶단 모습이 오늘따라 어수룩해 보였다.


 생각의 그릇이 조금 넉넉해진 탓일까, 부정적인 생각들을 이리저리 했어도 조금 객관적으로 나를 바라볼 수 있는 용기가 생기는 것 같다. 문득, 특정한 시간에만 통행하는 가변차로처럼 부정적인 생각을 내가 객관적으로 관조할 수 있을 때 보내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가변차로에 접어들기 전 점멸하는 신호등을 바라보며 계속 부정적인 감정과 생각들을 흘려보낸다. 여유로운 밤길에선 그 정도 생각을 흘려보내는 건 괜찮다. 누구 하나 뒤에서 재촉하는 이 없을 테고, 내 속도로 보낼 수 있으니까


 깜빡이는 신호등이 얼핏 내게 위로를 건네는 것 같기도 하다. 너무 빠르지 않게, 좌우 살피고, 너의 생각을 흘려보내라고 말해주는 친구가 생긴 거다. 알겠어, 커다란 생각은 조금 천천히, 부정적인 생각은 좌우를 살피고 흘려보낼게. 멍하니 마음속으로 신호등과 터무니없는 대화를 나누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조금 날카로워진 눈매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힘을 풀었다. 눈앞의 차들도 도로 옆에서 쉬는데, 나 하나 정도는 더 쉬어도 괜찮지 않겠냐는 엉큼한 생각을 하면서


밤길, 집으로 되돌아가는 길


 얼마쯤을 가변차로 앞을 차지하면서 걷다 집 가는 길에 들어섰다. 꺾여가는 중앙선에 시선을 주다 그리 어둡지만은 않단 생각에 고개를 들어 도로를 보았다. 먼 곳에서부터 가로등이 점점이 나를 밝혀오는 듯 보였다. 광원에서 추억, 감정이 흘러나오는 듯하다. 스쳐가는 작은 것들을 조명을 지날 때 더 비춰가며 느릿느릿 걸어간다. 불빛에 떠오르는 기억들은 간혹 쓴 맛이 나기도 하지만, 괜찮다. 아직 밟아가야 할 조명은 많고, 밤길에서의 나는 꽤나 너그럽다. 광원에 비추어져 나오는 기억의 쓴 맛에 침 한 번 삼키고, 단 맛에 설핏 웃으며 밤길을 걷는다. 난 밤길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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