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를 점점 먹어갈수록 속마음을 털어놓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곳을 찾기가 힘들어졌다. 가족 이야기, 우울하거나 스트레스받은 이야기,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가 무엇인지, 어떤 데에서 행복을 느끼고 만족을 하는지 등 이런 이야기들은 가치관이나 성향이 비슷하지 않으면 좀처럼 진도가 나가기 어렵다. 나와 반대되는 성향인 사람이 내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줄 확률이 매우 적기 때문이다. 이 상황은 물론, 나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25살, 대학교에 복학 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많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나서 더 외로워지는 건 왜 그런 걸까. 그 당시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인간관계에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았다. 예전에 쓴 가장 두려워하는 게 가장 원하는 것에서도 조금 썼듯이 동아리에서 있는 인원들이 추억을 좀 더 만들었으면 해서 나를 바쳤다. 희생이라고 하기엔 조금 거창하고, 바보 같은 순애보 정도였긴 하지만 말이다. 사람들에게 상처받고 갖은 책을 닥치는 대로 읽으니 생각만 더 많아졌다. 생각은 꼬리를 물어 외로움에 사무치게 했다.
나라는 사람을 온전히 드러내고, 그 존재 만으로도 인정받고 싶었다. 외로움을 더 깊은 외로움으로 이겨내는 게 참으로 지겨워졌다. 그래서 당장에 죽어버릴 게 아니라면, 외로움에 파묻혀 버릴 나란 놈에게도 존재의 이유가 있어야만 했다. 대학교나 동아리와 같이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드러낼 수 있는 곳이 필요했다. 그래서 무작정 네이버 카페를 뒤졌다. 남들은 취업을 위한 진로 탐색을 할 시기에 인생을 제대로 살아내기 위해 탐색을 했다. 그만큼 당시에 외로움을 이겨낼 특단의 방법이 필요했던 것 같다. 내가 좋아했던 것들, 좋아하고 싶은 것들을 무작정 떠오르는 대로 검색하다 독서 모임을 알게 됐다.
그때 눈에 들어온 독서모임의 이름이 세미콜론이었는데, 이름에 이끌려서 인지 몰라도 홀린 듯이 들어갔던 게 기억났다. 두 개의 완성된 문장을 하나의 문장에서 함께 쓸 때 쓰는 세미콜론(;)이 독서모임에 대한 참 적절한 비유 같았다. 처음으로 간 독서모임은 아직도 기억난다. 8명 정도의 사람이 모여 각자 읽은 책에 대한 소감을 나누고 좋았던 점, 비평할 점, 생각 등을 돌아가면서 나눴다. 다른 분들은 최소 30대 중반의 회사원이었음에도 두 주먹을 오들오들 떨면서 말하는 막내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었다.
그게 참 좋았다. 경청, 소통, 공감 이런 추상적인 것들의 가치가 어떻게 매겨지는지는 본인이 직접 경험해 봐야 알 수 있던 거였다. 떠듬떠듬 책에서 좋았던 문장들을 말할 때 말없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흐뭇한 눈길로 쳐다봐주던 어른들의 포근함을 아직 잊지 못한다. 말할 때마다 손바닥의 땀들이 마르고 나길 반복했다. 집 가는 길 버스 조명에 손바닥을 비추면 소금기 때문에 반짝반짝 빛났다. 집에 가는 길 혼자였어도 입에선 미소가 끊이질 않았고, 나 같은 놈도 존재 자체만으로 이렇게 빛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에 반짝이던 손바닥을 보며 조금의 확신을 얻었다.
우리가 함께 있는 시간 동안 우리는 존재만으로 빛나는 사람이라는 위로 덕분에 독서 모임을 열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독서모임의 구성원들은 같은 책을 읽고서 나와 전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도, 반대되는 생각을 하는 사람에게도 왜, 어떻게 그런 생각을 갖게 됐냐고 묻고 끈질기게 들어주었다. 범법이나 극단적 생각이 아니라면 의견의 다양성을 존중했다. 나도 그 방식을 보고 배우며 생각과 사고의 틀을 넓혀갔다. 마냥 어리기만 한 내가 조금 어른인 척할 수 있게 된 것도 멋진 어른들이 있던 독서모임에서 많이 배워간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