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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묵 Mar 06. 2023

J에게

 예전 제 모습이 너무 모자라게 느껴집니다. 사랑으로 인한 우울감과 패배감에 젖어 있던 제 모습이 너무나 그렇습니다. 어릴 때엔 제깟 주머니에 들어 있는 사랑이 누구라도 얼마쯤 차이가 없었겠지요. 누군가는 제 자신을 불태워 사랑을 하고, 누군가는 건강하게 사랑하고, 또 누군가는 거지 같은 사랑을 하고 그러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저는 그중에서도 병약하고 나약한 사랑, 이를테면, 초등학교 앞에서 팔던 병아리들 같은 그런 사랑을 했음이 분명합니다. 사랑을 주려 해도 몇 번의 삐약거림으로 죽어버릴 그런 사랑 말입니다. 그래도 어떻게든 살려보겠다고 지극 정성을 다해도 결국에는 죽어버리고 마는 겁니다.


 지나간 애정을 꺼내는 건 예의가 아닌 걸 압니다만, 이 또한 제게 남은 과거이자 역사 이므로 한 번 훑어보겠습니다. 저는 사랑에 미쳤었습니다. 갖은 수사로 과거를 꾸밀 순 있겠으나 본질은 그러합니다. 사랑에 미쳤고 늘 사랑을 갈구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저는 늘 사랑 앞에 약자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이란 녀석은 교묘하게 약아서 더 원하는 쪽의 값어치를 더 적게 매기더군요. 그러니까, 저는 사랑 앞에선 늘 약자였습니다.


 그녀는 이러한 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명백히 우위에 선 입장으로 사랑을 꺼냈습니다. 그러다 제가 만족할라 치면 그녀는 사랑보다 조금 더 커다란 아픔을 꺼내어 휘둘렀습니다. 가만 생각해 보면 일상이 그냥 그랬습니다. 어느 날은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데, 친한 친구 얘기를 꺼낸 적이 있습니다. 안지 꽤나 오래됐다곤 했지만 남자 친구와 데이트하는 와중에 꺼낼만한 이야기 소재는 아니지요. 듣기 싫다고 말하기도 전에 구체적인 이야기를 마구 말했습니다. 중국에서 아버지와 함께 사업을 하다가 이번에 사업차 한국에 들렀다. 구체적인 매출이 얼마 정도 된다. 근데 얼마 전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깁스한 채 입원했다고 말입니다.


 전 사랑 앞에 대들지 못하고 그냥 멍청하게 듣고만 있었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저와 비교를 하더군요.

네가 더 열심히 해야지. 네가 더 잘해야지. 야망도 없이 그렇게만 살 거야? 넌 속 편하게 사는구나?

번듯하지 못한 직장, 불안정한 미래와 그로 인해 제 자신에 대한 불확신까지.. 와다닥대며 마음에 아프게 꽂히는 사랑의 말이 참 징그럽게도 아팠습니다. 그날따라 햇빛은 왜 그리 눈부시던지 제 흐리멍덩한 눈에도 시리게 꽂히더랍니다. 그러고 그녀는 곧장 그 친구에게 걸려 온 전화를 받고 나선 친구 병문안을 갈 거라고 하더군요. 저는 그토록 시린 사랑에 속으로 오열하며 그러라 했습니다. 그러곤 저는 집에 가서 좋은 직장이나 돈을 위해 공부하겠다고 했습니다. 설움을 속으로 삼키며 집으로 터덜터덜 갔습니다. 잘 꾸미지 않던 그녀가 오랜만에 예쁜 원피스와 화장하고 온 걸 보고 내심 즐거운 데이트를 기대했음에도 말입니다. 꾸민 것 마저도 저를 위한 게 아니라 결국 그 친구를 위한 것이었죠. 휘둘러진 아픔에 소심한 반항을 해보긴 했습니다. 병문안에 가라고 한다고 진짜로 갈 줄은 몰랐다. 오랜만에 하는 데이트였는데 아쉬웠다. 지금 생각하면 어린아이도 비웃을만한 소심한 반항이었죠. 그 말을 들은 그녀는 되려 물었습니다. 아니 그럼 가라고 하지를 말던가. 네가 가라고 해놓고 이제 와서 나보고 화내는 거냐고 말이죠. 저는 머저리라서 그 말에도 차마 무어라 대꾸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이 이야기만 듣고선 제가 왜 아픔을 감내하며 만났는지 가늠하기 어려울 겁니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너무 아프기만 한 상처인 것 아니냐고요. 제가 저 일화를 꺼낸 건 기억에 남을만한 아픔 따위라서입니다. 그녀는 사소한 것에서부터 사랑을 휘두르곤 했었으니까요. 처음엔 약속 시간에 조금 늦는 것에서부터 나중엔 나는 가정에서 화목하게 자란 사람이랑 결혼할 거야. 넌 그렇지 않잖아?라는 아픔까지 말입니다. 그렇게 아픔을 휘두르는 와중에도 그녀는 사랑을 주는 것을 빼먹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은 생각지 못한 선물을 주기도 하고 자신의 말이 심했다며 편지로 속마음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아픔과 사랑을 휘두르면 꼭 끝에는 다 너와 우리를 위한 거라는 말을 빼먹지 않았습니다.


 저는 얼마나 약한 사람이었을까요? 사랑을 버리지 못한 저는 휘둘러지는 사랑에 몸을 내맡겼습니다. 이런 자기 파괴적 관계마저도 제 손으로 끝내지 못하고 그냥 나부꼈습니다. 그런 걸 가스라이팅이라고 하던가요. 이 년 남짓한 시간 속에 그 사람도 제 자신도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확증적으로 파괴했습니다. 그런 관계 속에도 사랑이 있었다는 게 진정 사랑의 위대함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약해져만 갔고, 누군가는 이 관계의 고리를 끊어야 했습니다. 사랑 한 겹으로 겨우 이어지던 관계의 고리는 제가 끊었습니다. 그녀가 습관적으로 헤어지자고 하던 말에 그러자고 했거든요.


 그녀는 전화를 하던 중 제가 더 이상 예전처럼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고 한 시간 후에 제가 준 선물과 편지 등을 몽땅 들고 와 헤어지자고 했죠. 저는 정말로 지긋했습니다. 나는 도저히 제대로 살 수 없는 지경인데도 누군가가 겨우 숨만 붙여 놓은 것 같았습니다. 집 앞에 찾아와 우는 그녀를 달래며 버스 정류장에 데려다주며 말했습니다.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다. 선물들은 내가 준 것이니 네 거다. 오 분 남짓한 그 시간에 제 말을 들은 그녀는 빵긋 웃으며 저에게 묻더군요. 그럼 우리 헤어지지 않는 거지? 다시 만나는 거지?라고 말하더군요. 그때, 처음으로 그녀에게 울분이 터졌습니다. 너는 내가 그렇게 만만하냐고 물었죠. 그 뒤로 그녀는 버스 창가 자리에 앉아 제가 준 선물이 가득 든 가방을 품에 안고 저를 조금 보다가 떠났습니다.


 헤어진 후에 집 근처에서 만날 뻔했다거나, 집 우편함에 그녀가 직접 만든 마스크걸이를 몰래 넣어놓고 간다거나 하는 일이 있었지만 그리 중요한 건 아니겠지요. 전 병약한 사랑과 삶의 틈바구니에서 피폐해진 몸뚱이를 삶으로, 생으로 어떻게든 이끌어 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대로 죽어버릴 순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어쩌면 그 사람도 겨우 사랑 조금으로 이어가던 관계를 잘 끝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말하니 눌어붙어있던 감정이 씻겨 내지는 것 같습니다. 이건 제가 겪은 사랑의 주관이니 그 사람의 입장에선 또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저같이 평범한 사람은 제 몫의 생각만 겨우 짜낼 수 있을 뿐입니다.


 조금 편리하게 제 처지만 생각해서 지난 감정을 이야기드렸습니다. 적지 못한 일들과 감정이 아주 많습니다만, 그건 정말 부질없는 셈법일 겁니다. 무수히 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 결과로 제 마음은 무엇도 담을 수 없게 빠그라졌을 뿐인 겁니다. 사랑을 위해 약자를 자처했던 사람의 말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지난한 사랑의 과거를 되짚은 이유는 이제야 사랑이 진정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소란스럽고 어지럽던 사랑이 마음속에서 이제야 침잠해 가는 걸 느낍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사랑을 바라온 저이기에, 오히려 사랑을 바라지 않기에 잘 사랑할 수 있는 지금이 참 어색합니다. 어떻습니까? 너무나 모자라 보이는 제 모습이요.


 실은 이렇게까지 지난 애정사를 털어놓을 생각은 없었습니다. 다만, 당신을 그리는 마음이 어떤 것을 딛고서 나아가는 것인지를 말하고 싶었습니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저는 더 이상 사랑이나 연모의 마음 따위를 그릴 수 없다 생각했습니다. 그저 삐걱거리는 기계처럼 겉으로나 멀쩡해 보이게만 살아갔을 겁니다. 전후사정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 후에 이런 저라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몹시 궁금합니다. 하지만 조금 웃기게도 너무 과하게 털어놓은 속마음 때문에 이 글을 직접 전할 수는 없겠군요. 전 오늘도 조용히 그대를 그리워하고 있겠습니다. 그러니 개의치 마시고 삶 속에서 마저 빛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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