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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아저씨 Mar 19. 2020

궁궐에 동물원과 케이블카가 있었다?!

당신이 모르는 과거의 3월10일

과거로부터 배우는 오늘 : 위하고 알새과오

목차

두려워할 유일한 대상은 두려움 그 자체

1929년 '검은 화요일'의 주식 폭락을 시작으로 대공황이 발생했습니다.

미국 기업들의 파산과 함께 실업률이 25%로 급상승하였고, 국민총생산이 절반으로 줄었으며, 은행도 속속 문을 닫았습니다. 이때 루즈벨트가 새로운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대공황에 맞서 뉴딜정책을 과감하게 밀어 부쳤습니다. 생산과잉을 해결하기 위한 농가 지원정책, 일자리를 만들기 위한 대대적인 건설사업, 실업자를 지원하기 위한 복지사업, 자본 유출 방지를 위한 금융 정책 등 케인즈학파의 주장을 적극 받아들인 것입니다.

뉴딜정책은 급한 불을 껐지만 최선은 아니었기에 대공황을 막지 못했습니다. 세계적인 경기 침체가 진행되는 요즈음 다시 뉴딜정책이 소환되어 찬반양론이 진행되고 있습니다만, 루스벨트의 취임사처럼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불안과 두려움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할 유일한 대상은 두려움 그 자체입니다"



궁궐에 동물원과 케이블카가 있었다?!

조선시대 고궁인 창경궁이 ‘창경원’이러 불리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1909년 일제가 왕실 공간이었던 창경궁의 격을 일부러 낮추기 위해 동물원으로 만들어 개방해놓았던 것인데요, 해방 이후로도 오랫동안 서울의 필수관광코스였습니다. 급기야 1965년에는 케이블카까지 개통되면서 창경궁의 궁궐 자취는 완전히 사라지고 놀이공원 창경원으로 변질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창경궁 복원 계획'이 수립되어 1983에년 복원공사를 위하여 일반공개를 중단하였고, 원래의 명칭인 창경궁으로 환원하였으며, 1984년부터 창경원(동물원과 식물원 시설 및 놀이공원) 대신 창경궁(궁궐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되기 시작했습니다. 최근에는 일제 때 끊겼던 창경궁과 종묘 구간을 90년 만에 연결하는 사업도 진행되고 있다 하니 다행입니다.

수백년 역사를 품고 있던 공간이 하루 아침에 동물원으로 둔갑하는 그런 치욕의 역사는 다시 없기를!


강감찬역 앞에서 만나!

역사상 고려와 거란(요나라)의 전쟁은 임진왜란만큼이나 큰 전쟁이었습니다.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키고 만주 일대에 대국을 건설한 북방 민족이었는데요, 993년 거란의 1차 침공을 시작으로 전쟁은 시작되었고, 20여년이 지난 1019년 강감찬장군의 역사적인 귀주대첩으로 마침내 거란을 완전히 물리쳤습니다. 이는 고려 초기 불안한 국제정세 속에서 나라를 지켜낸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서울 지하철 2호선 역 중에는 거란을 물리친 강감찬장군이 태어난 곳, 낙성대역이 있습니다. ‘낙성대’는 하늘에서 큰 별이 장군으로 내려왔다 하여 지은 사당 명칭으로써, 최근 지자체에서 낙성대역을 강감찬역으로도 부를 수 있다고 발표하며 ‘강감찬 도시’ 브랜드 구축에 나섰습니다.

무심코 지나치지 말고 도심 속 공원인 낙성대에 들러 자연과 역사를 만끽하는 것도 완연한 봄을 즐기는 방법 아닐까요!



집시의 노래, 지고이네르바이젠

파블로 사라사테는 19세기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라고 불립니다.

모짜르트처럼 어려서부터 음악의 신동이라 불렸고, 열 살 때 이미 스페인 여왕 앞에서 연주하여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선물 받기도 했답니다. 특히 화려하면서도 유연한 연주 기법은 신기에 가깝다는 평을 받았는데요, 정작 본인은 하루 14시간씩 연습한 노력의 결과라며 절로 얻은 재능이 아님을 강조했다고 합니다.

그의 작품 중 백미는 역시 ‘집시의 노래’라는 뜻의 ‘지고이네르바이젠(Zigeunerweisen)’인데요, 한때 TV에서 결정적 장면의 배경음악으로 많이 쓰여 익숙한 곡이기도 합니다.  

파블로 사라사테 '지고이네르바이젠' : https://youtu.be/Lrm7Fs7Ta48


도산 선생의 후예들

1897년 만민공동회에서 약관 19세의 나이로 강단에 올라 감동적인 연설을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외세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서는 실력을 키워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며 교육을 강조했던 그는 결국 일제의 침략을 목도해야만 했고, 독립운동으로 일생을 바쳤으며, 해방을 맞이하기 전 사망하였습니다. 자나깨나 독립만 생각했던 그에게도 죄스러운 마음이 있었으니, 59년 4개월의 생애 중 가족과 함께 지낸 기간 10여년 동안 아내에게 옷 한 벌 사주지 못한 것과 자식에게 학용품 하나 사주지 못한 것이라고 합니다.

민족지도자로서 나라의 독립이라는 거사를 도모하느라 가족을 제대로 챙기지도 못하고 죄스런 마음으로만 간직해야 했던 선생의 삶이 애틋하게 다가옵니다.

오늘은 바로 그 삶의 주인공인 도산 안창호 선생이 떠나신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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