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낮과 빛나는 밤
조안(鳥安)의 새벽, 물안개 속에서 길을 묻다
조안면을 처음 찾았을 때, 나는 물의정원을 걷기보다는 그저 조용히 머무르는 편을 택했다. 공원 입구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그곳에 내려앉은 고요를 깨뜨리지 않은 채 가만히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았다. 특별히 무엇을 하겠다는 의지도, 목적도 없었다. 그저 공간이 주는 적막함만으로도 마음의 허기를 채우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끔 찾던 물의정원은 어느덧 내 삶의 터전이 되었고, 비로소 나는 그곳의 흙을 밟으며 걷기 시작했다.
조안에서의 새벽은 강 건너 남쪽 데크 벤치에서 시작된다. 자전거 국토종주 표지석인 '밝은 광장 인증센터'가 있는 그 자리는, 이른 시간의 차가운 공기와 강의 은밀한 흐름을 가장 먼저 감각할 수 있는 지점이다. 서쪽으로는 운길산 능선이 길게 이어지고, 7부 능선 즈음에는 수종사가 한 폭의 그림처럼 걸려 있다. 수변 산책로를 마주한 북한강 지류에서 피어오르는 새벽 물안개는 세상을 무채색의 수묵화로 뒤바꾼다. 나에게 이 시간은 하루를 견딜 힘을 비축하는 '비주얼 명상'이자, 헝클어진 호흡을 고르는 거룩한 의례였다.
5월 하순이면 북한강변을 따라 붉은 양귀비 꽃밭이 끝없이 펼쳐진다. 초입에서 마주친 몇 송이의 떨림으로 계절의 전이를 예감한다. 꽃밭 안으로 깊숙이 들어서면, 한 송이 한 송이가 저마다 다른 표정으로 말을 건네온다. 강바람에 흔들리며 존재를 드러내는 꽃잎의 결은 역광 속에서 한 겹 한 겹 더욱 선명해진다.
나는 가끔 스마트폰을 낮게 두고 꽃을 올려다보며 사진을 찍는다. 부감(俯瞰)이 아닌 앙각(仰角)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 연약한 꽃 한 송이는 비로소 온전한 생명의 주인공이 된다. 2019년 5월 30일 아침 7시 26분, 아이폰의 셔터 속에 박제된 그 양귀비의 붉은 빛은 상실의 무채색을 견디게 하는 강렬한 생명의 신호였다. 가을이 오면 그 자리는 다시 황화코스모스의 주황빛으로 변한다. 같은 자리에서 계절에 따라 색을 달리하는 자연의 섭리를 보며, 나는 삶의 고통 또한 고정된 형태가 아님을 깨닫는다.
아침의 걷기가 존재의 확인이라면, 밤의 산책은 집착의 내려놓음이었다. 수변 산책로 중간, 강과 양수리를 동시에 조망할 수 있는 데크를 걷던 어느 날 밤이었다. 밤 10시를 알리는 시각과 함께 공원의 모든 조명이 일제히 꺼졌다. 갑작스러운 암흑 속에서 역설적으로 세상은 더 명확해졌다. 강 건너 양수리의 야경은 물결 위에서 차분히 가라앉았고, 인공의 빛이 사라진 밤하늘에는 무수히 많은 별이 자신들의 자리를 드러냈다.
조명이 꺼진 뒤에야 비로소 별이 보이듯, 내 삶의 화려했던 전성기가 꺼지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보이지 않던 내면의 별들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 밤의 풍경은 말없이 요동치던 마음을 진정시켰다. 물의정원에서의 걷기와 머묾은 나에게 특별한 사건을 주지는 않았으나, 상실로 인해 단단하게 뭉쳐있던 삶의 결들을 조금씩 풀고 다듬어 주었다. 그 미세한 변화의 결들을 기록하는 것, 그것이 내가 다시 펜을 든 이유이다.
당신을 둘러싼 세상의 화려한 조명이 일시에 꺼진다면, 그때 비로소 당신의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빛나기 시작할 '당신의 별'은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