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우리는 더 이상 지도를 펼쳐 길을 찾지 않는다. 목적지를 입력하면 알고리즘이 이동 시간을 계산하고 최단 경로를 제시하며, 선택지마저 최소화하여 우리에게 '이 길이 가장 효율적입니다'라고 알려준다. 기술이 삶의 복잡한 문제를 대신 해결해 주는 시대가 되었지만, 역설적으로 진로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어려운 질문이 되었다. 알고리즘이 제시해 주는 ‘빠른 길’은 존재하지만, 내 삶의 방향만큼은 어떤 기계도 대신 설계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30년간 디자인을 가르치며 수천 명의 학생들과 마주한 경험은 이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AI는 많은 직무를 빠르고 정확하게 처리할 수 있지만, 한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사고하고, 무엇에 몰입하며, 어떤 패턴으로 세상을 이해하는지는 끝내 인간만이 스스로 찾아야 하는 문제였다. 누군가는 관찰을 통해 배우고, 누군가는 손을 움직이며 이해하고, 누군가는 서사를 통해 사고하며, 또 누군가는 구조를 재조합하는 과정에서 해답을 찾는다. 이 ‘작동 방식의 차이’ 속에 학생들의 재능과 잠재력, 그리고 미래의 업(Work)의 형태가 조용히 자리하고 있었다.
AI 시대의 진로 디자인은 더 이상 ‘유망 직업’을 고르는 문제가 아니다. 변화 속도가 너무 빨라 특정 직업 자체는 몇 년 만에 의미를 잃을 수 있다. 대신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고, 그 원리를 기반으로 일의 구조를 설계하는 능력이다. 알고리즘이 대신할 수 있는 선택은 가치가 떨어지고, 기계가 대체할 수 없는 작동 방식은 오히려 더 중요한 경쟁력이 된다. 몰입이 일어나는 순간, 시간을 잊게 만드는 활동, 반복되는 관심,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발휘하는 장점들 속에는 이미 ‘나만의 업’으로 이어지는 패턴이 존재한다. 진로를 설계한다는 것은 한 사람의 재능과 경험, 관심이 만들어내는 이 패턴을 정확히 읽어내는 과정이다.
이 책은 바로 그 과정을 안내하기 위해 쓰였다. 기술이 주도하는 미래에서도 인간 고유의 사고방식과 감각이 어떤 방식으로 역할을 재정의하는지, 그리고 학생·부모·교사가 AI 시대에 함께 고민해야 할 진로의 기준이 무엇인지 정리하고자 했다. 진로는 정답을 찾는 일이 아니라, 각자의 방식으로 다시 디자인해야 하는 일이며, 그 과정 속에서 각자는 자신만의 업(Work)을 갖게 된다.
AI가 길을 추천해 주는 시대에도, 결국 자신의 삶의 방향은 스스로 질문하고 결정해야 한다. 이 책이 그 질문을 더 명확하게 만들고, 새로운 시대의 진로를 스스로 설계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깊이 있는 안내서가 되기를 바란다.
임경묵(mookss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