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산, 내 삶을 세우는 나만의 알프스

812m 사계절이 만드는 행복 근육

by mookssam

2005년, 나는 천마산을 품은 동네로 이사했다. 조안면에서 지낸 2019~2020년을 제외하면 지금 이 순간까지 줄곧 산 아랫동네에 살고 있다. 글을 쓰는 방 창문으로 눈을 들면 천마산 정상이 바로 보인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정상의 표정도 달라졌고, 그 변화는 자연스럽게 내 일상의 리듬을 만들어주었다. 그때부터 천마산은 단순한 동네 산이 아니라, 하루의 흐름을 정하고 마음의 방향을 잡아주는 조용한 기준점이 되었다.

경기도 남양주에 우뚝 선 해발 812m의 이 산은, 고려 말 이성계가 '손이 석 자만 길어도 하늘을 만질 수 있다'라고 하여 천마산(天摩山)이라 명명했다는 유래만큼이나 존재감이 또렷하다. 그러나 매일 바라보고 오르며 알게 된 것은, 그 존재감이 웅장함보다 ‘꾸준함’에 가깝다는 사실이었다. 천마산은 사계절을 통해 자연이 어떻게 시간을 만들고, 사람이 그 시간 속에서 어떻게 다시 세워지는지를 보여주는 산이었다.


상고대와 양지꽃

천마산의 봄은 언제나 계절의 속도와 다른 풍경으로 시작된다. 산 아래에는 봄빛이 내려앉지만, 3월의 정상은 여전히 겨울의 온도를 품고 있다. 새벽이면 상고대가 나뭇가지를 감싸고, 햇빛을 받는 순간 그 풍경은 마치 한여름에도 눈을 머금은 알프스의 정상처럼 빛난다. 봄은 아래에서부터 시작되지만, 정상은 늦게 녹아내리는 마지막 겨울로 계절의 경계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상고대가 사라지면 4월의 야생화가 그 자리를 잇는다. 현호색, 복수초, 양지꽃이 햇빛의 각도에 따라 서로 다른 순서로 산길을 물들인다. 돌핀샘으로 향하는 길목에서는 숲 가장자리와 바위틈마다 작은 꽃들이 조용히 계절의 전환을 알린다. 어느 해에는 양지꽃을 찾고자 한참을 헤맸지만 끝내 보지 못하고 하산해야 했다. 그런데 초입 길가에서 한 할머니가 스마트폰으로 노란 꽃을 찍고 있는 모습을 보았고, 그 양지바른 작은 자리에서 뜻밖의 양지꽃을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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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꽃(좌) 산괴불주머니(우)


녹음과 오감의 휴식

여름의 천마산은 물과 녹음이 풍경의 중심을 잡는다. 계곡물은 한여름에도 차갑게 흐르고, 숲은 빛을 여러 겹으로 걸러 깊고 안정된 그늘을 만든다. 나는 가벼운 캠핑 의자와 아이패드 하나만 들고 계곡으로 향한다. 발을 물에 담그면, 물소리와 바람, 주변의 녹음이 자연스럽게 하나의 배경음으로 겹쳐진다. 그 순간 천마산은 복잡한 일들을 잠시 분리해 놓고 숨을 고르게 해주는 여름의 쉼표가 된다.

정상에 오르면 축령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길게 드러나고, 정상부 소나무들은 바람과 눈을 견디며 다듬어진 시간의 조각처럼 서 있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았지만 완성된 형태를 보여주는 이 풍경은 자연만이 만들 수 있는 작품이다.


황금빛 물결과 공존의 숙제

가을의 천마산은 빛의 두께로 계절을 설명한다. 초입의 은행나무가 가장 먼저 황색으로 변해 산의 문을 열고, 산이 깊어질수록 색은 점차 짙어진다. 능선은 오후 햇빛을 받아 금빛으로 흔들리며 가을의 절정을 드러낸다.

그러나 화려함 이면에는 다른 장면이 있다. 가을이면 빈 배낭을 멘 도토리 채취꾼들이 자주 보인다. 그들의 움직임 뒤에는 겨울을 견뎌야 하는 산짐승들의 시간이 남아 있다. 이듬해 봄, 나무 밑동이 파헤쳐진 흔적은 배고픔의 기록이자, 인간과 자연이 같은 공간을 어떻게 나누어야 하는지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첫눈, 첫 발자국의 희열

나는 함박눈이 내린 다음 날의 천마산을 가장 좋아한다. 아무도 밟지 않은 흰 설원 위에 첫 발자국을 남기는 순간은 마치 새로운 삶의 첫 장을 여는 듯한 설렘이 있다. 그러나 산에 먼저 오른 것은 언제나 산짐승들이다. 노루와 토끼가 남긴 작은 발자국을 보면 자연이 나보다 앞서 계절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조용히 깨닫게 된다.

정상 9부 능선에 이르면 소나무에 쌓인 눈이 천마산만의 독특한 겨울 풍경을 만든다. 그곳에서 겨울 공기의 맑은 냄새를 깊이 들이마시면 몸과 마음이 함께 맑아지는 것을 느낀다. 시린 바람은 오히려 마음을 더 선명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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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산 설경(좌) 친구 제이슨과 필자(우)

삶을 행복하게 하는 힘

내게 천마산은 단순한 등산로나 운동을 위한 목적지가 아니다. 계절이 시간을 차곡히 쌓아 올리듯, 이 산은 내 안에도 작은 근육들을 하나씩 만들어준다. 몸의 근육만이 아니라, 견디는 마음, 기다리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의 근육까지도, 812m의 천마산은 내게 단순한 길이 아니다. 봄의 소박함, 여름의 시원함, 가을의 화려함, 겨울의 웅장함. 그 모든 계절이 내 몸의 근육이 되고 마음의 근육이 된다. 이 근육들은 단순히 삶을 버티게 하는 힘이 아니다. 자연이 주는 순수한 기쁨, 그리고 감사함으로 나를 행복하게 세우는 힘이다. 그리고 그 힘이, 때마다 나를 다시 산으로 이끈다.


지난 10여 년간 나는 여덟 번의 상실을 경험했다. 이 글은 그 상실을 지나며 걷고·오르고·타며 몸과 마음의 근육을 다시 쓰는 일로 일상의 리듬을 회복해 갔던 시간들을 회고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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