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히말라야, 운길산 수종사
[3 전반부의 걸음이 북한강변을 따라 수평적으로 이어졌다면, 이제 발걸음은 중력을 거슬러 수직적인 오름으로 전환된다. 산을 오른다는 행위는 단순히 육신을 고단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육체의 한계를 지각함과 동시에 내면의 꼴을 다시 단련하는 실존적 수행에 가깝다.
요즘은 전원마을의 골목조차 포장된 매끈한 길로 변해버렸지만, 산의 길은 여전히 투박한 흙의 질감을 고수한다. 사람들은 맨발로 땅을 밟는 '어싱(Earthing)'을 위해 일부러 길을 찾아 나서지만, 산에서는 그 모든 감각이 순리대로 흐른다. 흙길과 돌계단, 바위를 한 발씩 딛고 오르다 보면 어느새 산의 호흡과 나의 호흡이 나란해지는 지점에 도달한다.
나에게 운길산은 정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이곳은 나를 깊은 사색으로 이끄는 산이며, 조용한 순례자의 기(氣)가 깃든 자리다. 절 입구까지 임도가 포장되어 있어 차량의 왕래가 잦지만, 나는 언제나 왼편의 흙길 등산로를 고집한다. 흙길의 저항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시작해야만 '오름'의 의미가 비로소 또렷해지기 때문이다. [1]
수종사 주차장에 닿으면 절의 관문인 일주문(一柱門)이 서 있다. 일주문은 속세의 번뇌와 사찰의 고요를 구분하는 상위적 경계다. 이 문을 통과하는 순간, 길을 감싸는 공기의 밀도가 달라진다. 백여 개의 가파른 계단을 오르고 좁은 쪽문을 지나야 비로소 수종사의 마당이 열린다. 공간을 한 번에 드러내지 않고 차례차례 켜를 쌓아 보여주는 전통 사찰의 구성 방식은, 우리 인생이 진실에 다가가는 과정과 닮아 있다.
대웅전 마당에 서면 북한강의 굽이와 산의 흐름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다실에서 마시는 차 한 잔은 미각을 채우는 맛보다 마음을 가라앉히는 행위 그 자체에 가깝다. 바람의 결 속에 섞여 들어오는 차의 온기는 상실로 차가워진 가슴을 가만히 어루만진다.
하지만 내가 가장 오래 머무르는 자리는 따로 있다. 마당에서 몇 걸음 더 오르면 나타나는 '묵언(默言)'이라는 투박한 팻말 앞이다. 물의 정원과 북한강, 양수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그곳은 내 이름의 돌림자인 '묵(默)'과 닿아 있어 처음부터 운명처럼 발걸음이 머물렀다. 그 자리는 구태여 말이 필요 없는 곳이었다.
일찍이 영상 예술의 현장에서 들었던 '침묵도 음향이다 (Silence is also sound)'라는 격언이 이 자리에서 늘 다시 떠오른다. [2] 어떤 장면은 인위적인 소리를 더하는 대신, 모든 소리를 거두어낼 때 비로소 그 깊이가 완성된다. 나의 상실 또한 무수한 위로의 말보다 이 고요한 침묵 속에서 비로소 그 형태가 온전히 이해되었다.
나에게 운길산은 정상을 탈환하기 위해 오르는 산이 아니다. 멈추기 위해 오르는 산이며, 고요함 그 자체가 위로가 되는 산이다. 그렇기에 이곳은 나만의 히말라야와 같다. 걷고 오르는 단순한 행위들이 내 삶을 다시 움직이게 하던 시절, 운길산은 힘든 일상 중에 나를 기다리는 가장 단정한 '인생의 디저트'가 되어주었다. [3]
[1] Gaston Bachelard, L'Eau et les Rêves, Paris: José Corti, 1942, pp. 15-28. (대지의 저항을 통해 자
아를 인식하는 물질적 상상력에 관하여)
[2] 김종래, 영상 제작의 실제, 서울: KBS 영상연수원 강연록, 1997. (침묵의 음향적 가치와 공백의 미학
에 관한 고찰)
[3] 김형석, 백 년을 살아보니, 서울: 신앙과지성사, 2016, pp. 112-125. (인생의 고난을 인격의 성숙으로 전환하는 사유의 힘에 관하여)
소크라테스의 질문
"세상의 소란함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 오직 고요만이 남은 그 자리에서 비로소 들리기 시작한 당신의 참된 목소리는 무엇입니까?"